‘전국에 영안실이 몇 개인데 부고란이 이리 황량할까.’ 올 초부터 인사 동정 부고를 정리하는 ‘사람들면’을 만들면서 매일 마감 무렵 드는 생각이다. 신문사가 부고를 정리하는 기준은 제보. 부고를 써서 팩스와 이메일로 신문사에 보내면 담당 기자가 확인 후, 발인 날짜가 남은 소식에 한해 소개하는데 많아야 하루 10건을 넘지 않는다.
11일 새벽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일하다 숨진 김용균씨의 소식은 부고란에 실리지 않았다. 그의 죽음은 본보 12일자 사회면 ‘하청업체 근로자 김모씨’로 보도됐고 이튿날 온전한 이름으로 종합면에 소개됐다. 일부 언론은 김씨 사망으로 세상이 떠들썩해진 17일에야 소식을 지면에 실었다. 이를 두고 ‘가진 자의 권익이 침해되는 일’이기 때문이란 풀이가 나오지만, 몇 해 전 노동 취재를 담당했던 나는 이런 해석에 동의하지 않는다. 고용노동부가 확인한 올해 국내 산재 사고 사망자는 상반기만 503명이다. 공공운수노조가 한국남동발전·서부발전·중부발전·남부발전·동서발전 5개 발전사에서 2012년부터 2016년까지 5년간 발생한 사고 346건을 분석한 결과 337건(97%)이 하청 업무에서 발생했다. 신고나 집계 누락 가능성을 고려하면 실제 사망, 사고는 이보다 많을 것이다. 요컨대 김씨의 비극은 503명의 죽음처럼, 337건의 사고처럼 새삼 뉴스라고 말하기 겸연쩍을 만큼 편재했다.
‘왜 어떤 사건은 잊혀지고, 어떤 사건은 기록되는가. 그 중 어떤 사건은 길이길이 남아 의미를 갖는가.’ 고 3때 대학 원서를 쓰다 문득 이런 게 궁금해진 나는 유튜브도 페이스북도 없던 그 시절, 그런 걸 가늠하는 건 매스미디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디어의 생산, 유통, 소비 구조를 구경하면 그 기준을 알 수 있을 거라 순진하게 짐작했다. ‘4년 잘 구경하다 (전공 상관없이) 취직해야지.’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고 작가 유시민이 말한 ‘관성의 법칙(물리학 관성의 법칙처럼 새로운 걸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 있던 그대로 머물려는 자세)’으로 기자가 됐다. 잘하는 거라곤 ‘구경하는 것’ 밖에 없었던 나는 구경한 걸 기록하는 일로 밥을 벌며 어떤 사건이 기록되는지, 길이길이 회자되는지를 매일같이 체득하고 있다. 이제 내가 20년 전의 나 같은 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언론이 뭘 기록할지에 관한 명확한 기준 같은 건 없고 다만 체득을 통해 쌓인 관성이 작동하는데, 때로 어떤 계기가 그 힘의 방향을 바꾸기도 한다는 것 정도다.
김용균씨의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건 노동조합에 가입한 게 결정적이었다. 계약해지라고 쓰고 해고라고 읽는 나라에서, 김씨와 같은 하청업체 근로자를 포함해 비정규직의 노조가입률은 2%미만(2017년 ‘고용형태별 근로실태조사’)이다. 김씨는 그 2%의 사람이었다. ‘나 김용균은 화력발전소에서 석탄설비를 운전하는 비정규직 노동자입니다’라고 쓴 노조 피켓을 든 용균씨 사진을 보고 내가 처음 뱉은 말은 “안타깝다”가 아니라 “용감하다”였다.
사고는 김씨가 속한 노조가 대통령과의 면담을 요구하기 위한 기자회견을 ‘프레스센터’에서 열기 직전에, 그것도 매우 참혹하게 터졌다. ‘비정규직 대표 100인 기자회견’에 참석한 이태성씨는 “오늘 동료를 잃었다. 25살의 꽃다운 젊은 청춘이 석탄을 이송하는 설비에 끼어 머리가 분리되어 사망했다”고 말했다. 1년에 천명 꼴로 발생하는 산재 사고 사망자 중 김용균씨만이 몇몇 매체에 기적적으로 기록됐다. 사고가 참혹한 만큼 여론이 들끓었다. 정부와 여당은 ‘김용균법(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임시국회 안건으로 올렸다.
예수가 태어난 날, 가장 낮은 자리에 임했던 이의 생을 인류가 수천 년간 기린 날, 김씨의 삶과 죽음을 생각한다. 지금 여기를 사는 우리는 누구의 생을 기록해야 하는가. 어떤 생을 기억해야 하는가.
이윤주 지역사회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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