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카드로 대북ㆍ대내 생색에 ‘성의 표시’ 명분 축적
北 “제재 해제만이 美진정성 판별 시금석” 입장 확인
판문점 첫 방문한 비건 美대북대표, 北인사 접촉 없어
‘일석삼조(一石三鳥)를 노린 영리한 전술적 선택.’
인도적 대북 지원까지 막히는 일이 없도록 자국민 대상 북한 여행 금지 조치를 재검토하겠다는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특별대표의 19일 ‘방한 일성(一聲)’이 나오게 된 배경을 놓고 외교가에서 제기되는 분석이다.
현재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난감한 처지다. 중국과 러시아의 이탈 조짐으로 불안하게 유지되고 있는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체제를 흔들지 않으면서 제재 해제를 요구하며 침묵에 들어간 북한을 다시 비핵화 협상 테이블로 끌어내는 일견 모순적인 과업을 해내야 하기 때문이다. 대북 유인 지렛대가 필요하다.
자국 내에서는 지난달 6일(현지시간) 중간선거 이후 대북 인도 지원을 비핵화 협상과 연계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커진 상황이다. 선거 이튿날 미 상원 외교위원회 에드워드 마키 민주당 의원이 비핵화와 인권 개선을 위한 대북 압박도 중요하지만 미 구호 활동가들의 방북과 활동이 제한돼서는 안 된다는 내용의 편지를 트럼프 행정부에 보냈고, 며칠 뒤에는 35개 미 비정부단체(NGO)도 행정부와 의회 등이 수신인인 공개 서한을 통해 미 구호단체 관계자들의 방북을 허용해 달라고 요청했다.
내년에 북한이 호전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거라는 비건 대표 방한 당일 친북 매체 조선신보(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기관지) 보도가 시사하듯 어차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신년사 내용이 강경해질 공산은 크지 않다는 게 대북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이미 어떤 카드든 내놓기만 하면 효과가 담보되는 여건이 조성돼 있었던 셈이다.
때문에 비건 대표의 인도 지원 시혜(施惠) 시늉은 새롭지 않은 데다 공허한 카드로 북한과 야권에 생색을 내고 협상 재개를 위해 선제적으로 성의를 보였다는 명분까지 확보할 수 있게 만드는, 아주 효율적인 시도일 수 있었다. 홍현익 세종연구소 외교전략연구실장은 20일 “애초 인도적 지원을 위한 방북을 막는 게 잘못이었고 인도 지원과 대북 협상은 무관하다는 게 미국의 입장이었던 만큼 비정상적이던 걸 시정하는 정도 의미밖에 없는 행동이었다”고 했다.
더욱이 남북 간에도 ‘협력’이라 부르자고 할 정도로 ‘지원’이라는 표현을 불쾌해하는 북한이 당장 호응할 가능성은 없다는 게 전문가들의 대체적 전망이다.
실제 북미간 전선(戰線)은 그대로다. 전날 부대변인 브리핑을 통해 북한 비핵화가 달성될 때까지 제재를 지속한다는 입장을 거듭 확인한 미 국무부는, 이날도 관영 방송 미국의소리(VOA)를 통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북한 인권 유린에 ‘가장 책임 있는 자’(김 위원장)를 표적 제재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한다”며 북한을 자극했다. 요지부동인 건 북한도 마찬가지다. 제재 해제야말로 북미 비핵화 협상에 임하는 미국의 진정성을 판별하게 해주는 시금석이라는 요지의 개인 논평을 이날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발표했다. 다른 건 필요 없다는 뜻이다.
하지만 상관없이 일방적 대북 유화 제스처는 이어질 전망이다. 이날 비건 대표는 판문점을 방문했다. 5번째 방한 만에 처음이다. 9ㆍ19 군사합의 이행에 따른 비무장지대(DMZ) 긴장 완화 현황을 확인하려고 비무장화한 공동경비구역(JSA)을 살펴봤다. 그러나 카운터파트인 최선희 외무성 부상 등 북측 인사들은 만나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21일 외교부에서 열리는 한미 워킹그룹 2차 회의에서는 한국 정부가 지난해 9월 의결하고도 아직 집행하지 않은 800만달러(90억여원) 규모 국제기구 인도 지원 사업 공여금을 어떻게 처리할지도 논의된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협의가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