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이 죄를 지어 벼슬할 수 없는 집안’을 일컫는 ‘폐족’(廢族)이란 말을 정치에 소환한 사람은 안희정 전 충남지사다. 2007년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당선된 직후 ‘친노라고 표현되어온 우리는 폐족입니다’로 시작하는 글을 홈페이지에 올렸다. “우리의 노력이 국민과 우리 세력 다수의 지지를 얻는 것에 실패했습니다. 우리는 변화와 개혁에 실패했습니다…이 모든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비슷한 시기 이해찬은 “비통한 심정이고 죄송한 마음”이라 했고, 당시 여권의 정동영은 “서민과 중산층 가슴에 못을 박았다”고 고개를 떨궜다.
□ 폐족이란 단어는 친노 세력에게 주홍글씨처럼 붙어 다녔다.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는 문재인 후보에게 ‘폐족 친노 심판론’을 씌워 공격했다. “스스로 폐족이라고 부를 정도로 국민의 심판을 받은 분들이 다시 모였는데 이 것이야말로 심판의 대상”이라고 몰아붙였다. 급기야 양정철, 이호철, 전해철 등 ‘3철’을 포함한 ‘친노 9인방’이 대선 캠프에서 물러났고 이해찬 대표 등 당 지도부도 사퇴했다. ‘친노’ 딱지는 천형(天刑)이나 다름 없었다.
□ 문 대통령 당선으로 폐족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입법부와 행정부 주요 포스트를 ‘노무현의 사람들’이 접수한 모양새다. 특히 친노 인사 중에 현재 정치권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그룹은 노무현 정부 청와대 출신이다. 당시 비서실장과 민정수석을 지낸 문 대통령과 호흡을 맞췄던 이들이다. 문 대통령이 2012년 대선에서 낙선하고 민주당 당 대표를 거치는 동안 친문이라는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자라났다. 현재 청와대와 내각, 민주당 등 당정청의 핵심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다. 하지만 불과 1년 반 만에 경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 민주당이 18일 주최한 토론회에서 최배근 건국대 교수는 “지금 정신 안 차리면 제2의 폐족이 오고 민심은 싸늘히 식어갈 것”이라고 질타했다. 민생ㆍ경제에서 성과를 못 내면 총선 승리는 물론 재집권에 실패해 현 집권세력은 다시 폐족으로 전락할 것이라는 경고다. 후견인인 정조가 숨지자 스스로를 폐족이라 칭한 정약용은 벼슬길이 막힌 자식들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다’고 당부했다. 기회가 찾아왔을 때 잡을 수 있도록 미리 준비하라는 경계였다. 문재인 정부는 10년 만에 되찾은 기회를 다시 놓치려는 건가.
이충재 수석논설위원 cjlee@hankookilbo.com
※ <한국일보> 논설위원들이 쓰는 칼럼 ‘지평선’은 미처 생각지 못했던 문제의식을 던지며 뉴스의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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