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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너] 대한민국 ‘마약왕’의 계보, 끝나지 않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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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리지너] 대한민국 ‘마약왕’의 계보, 끝나지 않은 이야기

입력
2018.12.19 18:02
수정
2018.12.19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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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 탕”

1980년 3월 19일 오후 4시쯤, 부산 남구 민락동의 한 주택에서 두 발의 총성이 울립니다.

“접근하면 쏴 죽인다!”

“자수하라!”

총으로 위협하는 남성과 수사반 사이에 오간 긴박한 대화. 남성은 “나는 집행유예 중이다. 이제 잡히면 살 가망이 없다”며 거부합니다. 민락동 야산 중턱, 660㎡(200평) 대지에 지어진 초호화 주택에는 당시 개념조차 생소했던 감시카메라와 소음에 반응하는 경보 시스템이 갖춰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날, 이 남자에게는 첨단 장비들이 소용 없었던 것 같습니다.

잠시 후 소총으로 무장한 부산 남부경찰서 소속 전경 대원 74명이 현장에 도착해 집을 에워쌉니다. 포위망이 좁혀지자 남성은 자신이 기르던 셰퍼드 2마리와 진돗개 1마리를 풀어 위협했고, 경찰은 이 중 2마리를 사살합니다. 대치 상황은 2시간 넘게 이어집니다. 오후 7시 12분, 경찰이 최루탄을 사용해 진압을 시도하려던 찰나, 또 다른 남성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앰뷸런스를 불러라.”

총을 쏜 남성은 오른 쪽 어깨에 피를 흘리며 실신해 있었습니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을 때, 함께 있던 형이 제지하면서 부상을 입고 쓰러졌던 것이죠. 희대의 검거 작전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

이 남자의 이름은 이황순(당시 45세). 그 시절 한국 마약범죄 사상 최고치에 달하는 140㎏(460여만명 동시 투약 가능)의 필로폰을 제조해 일본으로 수출했던 ‘코리안 커넥션’의 대부였습니다. 1970년대 초반 금괴와 시계를 밀수하면서 축적한 자금으로 ‘마약왕’의 자리에 올랐던 그였죠. 하지만 이황순의 검거는 한국 마약 연대기의 종착점이 아닌, 시작이었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오늘 [오리지너]는 영화보다 영화 같은 현실, 혹은 허상일지도 모르는 현실에 대해 이야기 하려 합니다. 중추신경의 교란으로 수많은 사람을 노예로 만들지만 그 참혹한 현실은 잘 알려지지 않은, ‘마약’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황순, 윤재성… 마약 연대기의 시작 

영화 같은 현실 속 사건은 생각보다 빈번했습니다. 한국 마약 범죄 사상 둘도 없는 악당으로 길이 남을 것 같았던 이황순의 ‘기록’이 깨지는 데는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습니다.

1989년 9월 28일 검찰은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고급 주택가를 급습합니다. 정부 당국을 비웃기라도 하듯 마약 단속반 사무실에서 불과 1㎞ 떨어진 거리에 차려진 ‘마약 공장’. 이 때 압수된 필로폰의 양은 20㎏에 달했지만 빙산의 일각이었습니다. 수사 결과 필로폰을 생산한 이들은 1987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무려 220㎏의 필로폰을 제조했습니다. 과거 이황순이 만들었다는 140㎏을 훌쩍 뛰어넘었죠. 주범은 놀랍게도 유명 아동복 브랜드였던 ‘피터팬’의 김정숙 회장이었습니다. 그는 ‘아시아 최고’의 필로폰 제조 기술자로 이름을 떨쳤던 윤재성의 아내였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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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재성은 수사가 본격화 되기 전 간암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그가 남긴 기록은 무시무시합니다. 윤씨 부부가 1975년부터 10년 넘게 생산한 필로폰의 총량이 무려 2,000㎏을 넘어 설 것으로 추산됐습니다. 1회용 주사기 730만대 분량이었습니다. 수사 당국은 그 절반 가량이 국내에 유통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보다 1개월 앞선 1989년 8월에는 김포공항에서 700㎏에 달하는 마약 원료가 밀수 과정에서 적발되기도 합니다.

'헤로인의 세계'에는 ‘골든 트라이앵글(Golden Triangle)’이라는 별칭이 있습니다. 헤로인의 원료가 되는 양귀비의 최대 생산지였던 태국, 라오스, 미얀마 등을 부르는 말이었죠. 1980년대, 한국도 트라이앵글의 한 축이 됩니다. 필로폰의 원료를 제공하는 대만, 주 소비시장인 일본과 함께 주요 제조국으로 지목돼 ‘화이트 트라이앵글(White Triangle)’이라는 불명예를 얻게 됩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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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 수입국’의 진짜 의미 

암 거래로 유통될 수 밖에 없는 필로폰의 실 거래가격과 관련해선 여러 설이 있습니다. 1980년대 초엔 국내 시세보다 일본의 시세가 2배 가량 더 비쌌다고도 합니다. 특히 필로폰 제조가 가능했던 이들은 300만원 상당의 원료로 1억원 어치의 필로폰을 생산할 수도 있었다고 하죠. 정확한 규모를 헤아리긴 어렵지만 마약업자들이 엄청난 이익을 남겼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심지어 일본은 우리 정부에 “한국이 마약 단속에 소홀한 것이 의도적인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드러내기도 했습니다. 필로폰이 외화벌이 도구가 되는 것을 한국 정부가 수수방관하는 게 아니냐는 의미였죠.

이황순 윤재성 같은 밀조업자들의 존재는 대규모 마약범죄가 중남미나 동남아 만의 이야기가 아님을 뜻했습니다. 다른 측면에서는 마약 제조업이 이미 하나의 ‘암흑 산업’으로 깊게 뿌리내렸음을 의미했죠. 하지만 이들의 검거가 곧 비극의 종식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포스트 이황순-윤재성'의 시대로 접어들고 나서야 우리 사회는 이미 오래 전부터 직면했던 심각한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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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뽕 밀조범 집중단속으로 국내 히로뽕 공급물량이 부쩍 줄면서 가격이 국제밀매 가격의 2~3배나 폭등함에 따라 ‘히로뽕 수출국’이었던 우리나라가 ‘히로뽕 수입국’으로 바뀌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1990년 12월 13일자 한국일보) 

한국 미국 일본 영국 캐나다 호주 대만 태국 콜롬비아 등 8개국 마약관계관들이 당시 우리 대검찰청에 모여 진행한 회의의 주 내용이었습니다. 우리 정부의 단속 강화 후 암시장에서 한국산 필로폰의 품귀 현상이 벌어졌다는 내용이 공유됩니다. 일본 측 대표는 80년대초 일본 밀반입량의 70~90%이던 한국산 필로폰이 1989년에는 12%로 급감한 대신 대만산이 84%로 급증했다고 말합니다. 반면 우리 측 대표였던 유창종 대검 마약과장은 1988년 10월 만 해도 5,000~1만원 선이었던 서울 지역의 필로폰 1회 투여분(0.03g 안팎) 소매가격이 1990년 연말에는 5만~7만원 선으로 10배 이상 폭등했고, 부산에선 최고 10만원에 밀거래 되고 있다고 밝힙니다.

대형 필로폰 제조업자들의 잇따른 검거 후 국내 필로폰 가격이 폭등했고, 이 과정에서 가격 경쟁력이 생긴 외국산 필로폰의 밀수입이 뚜렷하게 증가한 것이죠. 단편적인 사실만 놓고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제조업자들을 잡아 들인 것이 국내 마약 유통을 더 활성화 시킨 게 아니냐는 추측을 불러올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분명하게 입증된 사실 중 하나는 가격이 10배가 넘게 올라도 필로폰을 끊지 못하는 국내 소비층, 즉 심각한 수준의 중독자가 이미 다수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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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많은 필로폰은 어디로 간 것일까 

우리나라에 마약이 본격적으로 유입돼 중독자라는 개념이 생긴 시점은 19세기 중반 청나라와 영국 간에 벌어진 아편전쟁 전후로 추정됩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이후 1970년대에 이르기까지는 아편, 헤로인, 모르핀 등 천연 마약류가 중심을 이뤘죠.

천연 마약류에 대한 규제가 시작되면서 그 틈을 비집고 급격히 유통량이 증가한 것은 중추신경계를 교란하는 필로폰(메트 암페타민) 등 향정신성의약품이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의료 목적으로 만들어진 이들 의약품이 신체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 지, 어떤 성분인지에 대한 지식도 부족했기 때문에 유통 초기부터 효과적인 단속을 펼치는데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때문에 필로폰 중독은 1980년대 들어서야 본격적인 사회 문제로 부각됐습니다. 하지만 마약의 공급과 유통, 그로 인한 피해를 종합적으로 분석하려는 시도는 드물었죠.

여론의 화살은 중독자, 즉 ‘약물의 유혹도 이기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며, 모두가 수출 역군으로 피땀을 흘리는 와중에 고가의 약물을 남용하며 부도덕한 기행을 일삼는 사회 암적 존재’에 대한 비난으로 쏟아졌습니다. 직장인 주부 학생 등으로 필로폰 투약자가 확산되고 있었지만 정부 당국자의 분석은 “(필로폰 등) 각성제 선호경향이 향락과 퇴폐적인 사회 분위기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데 머물러 있었죠.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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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약 산업의 한 축을 담당했던 ‘범죄 조직’을 바라보는 시각도 비슷했습니다. 1986년 ‘서울 목포파’ 사건이 한 예가 되겠습니다. 국내 대형 폭력 조직이 일본 야쿠자와 직접적인 교류를 갖고 필로폰을 대량 유통한다는 단서가 나오기도 했지만 여론은 그들이 룸살롱에서 벌인 살인과 폭력 행각에만 주목했습니다. 조폭 간에 벌어진 ‘주도권 쟁탈전’ 이상의 의미를 포착하지 못했던 것이죠.

정부의 집계도 많은 국민들로 하여금 ‘마약은 나와 내 가족과는 무관하며 멀리 있는 것’이라는 ‘착시’ 현상을 키우는 데 일조합니다. 1988년 보건사회부는 1분기 마약사범 검거 결과를 발표하면서 심각한 경고 메시지를 담습니다. 1~3월 적발된 필로폰 사범 숫자가 326명으로 전년 동기 대비 88%나 증가했다는 것이었죠. 그러나 앞서 이황순 윤재성 등 주요 밀조업자들이 국내에서 유통한 필로폰 규모가 최소 수백만명 분에 달한다고 파악했던 수사기관의 수사 결과와 비교하면 턱 없이 낮은 수준입니다. 당시 단속 인력의 부족 등을 고려한다 해도 말이죠. 심지어 보건사회부 관계자도 언론에 “(국내 필로폰) 중독 또는 복용 경험자만 1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습니다.

이쯤에서 많은 의문이 생깁니다. ‘수출 역군’이라고 스스로를 추켜 세웠다는 ‘마약왕’ 이황순이 제조한 필로폰은 정말 모두 ‘수출용’이었을까요. 주택가 한 복판에 차려졌던 윤재성의 ‘마약 공장’은 서울 서초동 한 곳 밖에 없었을까요. 우리 나라에는 몇 명의 이황순 윤재성이 있었을까요.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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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약 청정국’이라는 허상 

1990년대 이후 적발된 마약 범죄의 규모는 대부분 이황순이나 윤재성의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습니다. 상황이 나아졌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마약 유통 현실의 극히 일부분만을 반영한다는 필로폰 투약 사범의 검거 숫자는 해마다 크게 늘었습니다. 주변에 온갖 폭력이 난무하는데도 살인범 같은 강력범의 검거 숫자가 줄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가 더 안전해졌다고 볼 수 있을까요.

마약류 사범이 매우 적은 나라를 흔히 ‘마약 청정국’이라고 일컫습니다. 정확한 기준은 없지만 인구 10만명당 마약류 사범이 20명 미만일 때 해당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죠. 우리나라는 여전히 대외적으로는 마약 청정국의 이미지를 강조하지만 실상은 다릅니다. 대검찰청의 집계에 따르면 이미 2016년 적발된 마약류 사범만 1만4,214명으로, 10만명당 약 30명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지난해 역시 1만4,123명으로 고공행진을 이어가는 중이죠. 검찰은 공식 통계에 잡히지 않는 범죄자의 숫자가 20~30배에 이를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집계 기준의 차이는 있지만 경찰청의 통계도 마약 사범의 숫자가 급증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비공식적으로는 아주 오래 전부터, 이제는 공식적으로도 한국이 마약 청정국이라는 믿음은 허상에 가깝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저작권 한국일보]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2018년 12월에도 마약은 우리 주변에 그 존재감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12월17일에는 멕시코에서 중국으로 가던 60㎏이 넘는 코카인이 부산본부세관에서 적발됐습니다. 부산항 개항 이래 적발된, 가장 많은 양이라고 합니다.

연합뉴스
연합뉴스

지금도 SNS에서는 필로폰이나 대마초를 지칭하는 은어를 검색하기만 해도 사고 팔겠다는 게시물이 즐비합니다. 보유하고 있는 필로폰의 실물 사진이나 동영상을 함께 게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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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포기해선 안되겠지만, 지구상에 존재하는 마약의 양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어둠의 수익, 그리고 투약자의 규모는, 파악하기 힘든 실체입니다. 어떻게 대응하고 극복해 나가야 할 지 답을 찾는 것도 그만큼 어렵겠죠. 그러나 참혹하리만치 선명한 마약의 흔적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며, 여기서 답을 찾을 수 있을 지도 모릅니다.

 이씨는 20대 초반 아들을 낳고 산후조리를 제대로 못해 2년 동안 몸을 가누기 어려울 정도로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다 통증을 완화해 줄 것이라며 친구가 건네 복용한 ‘누바인(염산날부핀)’이 그를 구렁텅이로 빠트렸다. 누바인을 장기간 사용한 혐의로 징역 8월에 집행유예 선고를 받은 이씨는, 불과 선고 보름 뒤 필로폰을 접하게 됐다. 

 2007년 아는 언니네의 ‘작업’으로 또 재판에 넘겨진 딸은 선고 전날에도 주삿바늘을 꽂았다.(중략) 딸은 잘못을 인정했다. 무릎을 꿇더니 제 손으로 112에 신고했다. 자수한 데다 유치장에서 발작을 일으켜 고대안산병원으로 실려가기도 했을 정도로 그때는 딸 상태가 죽기 직전의 폐인 꼴이어서 그런지 선처(치료조건부 기소유예)가 떨어졌다. (중략) 한줌 희망이야 버리지 못했지만 딸이 중독 회전문을 탈출하는 건 불가능하리라 봤다. _딸이 마약 중독자였던 권모씨 


 의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마약류 의존자 대부분이 ‘말기 암 환자’같은 상태에서 병원 문을 두드린다. 중독이 그래서 무서운 거다. 최다 재발시기인 단약 3개월 내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 (기분을 좋게 하는 신경전달물질인) 도파민 생성기능 등이 정상에 가까워지도록 뇌가 회복되는데 최소 1~2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단약이 1년을 넘기면 재발률은 더욱 떨어진다. _조성남 강남을지병원장 

 보건복지부가 지정한 전국 22개 지정 치료보호기관 중 환자를 치료하는 병원은 사실상 두세 곳뿐이다. 2016년 치료 252건 중 강남을지병원(146건)과 국립부곡병원(86건) 두 곳이 무려 92%를 맡았다. 나머지 20곳은 모두 5건 이하. 그마저도 한국마약퇴치운동본부 등의 요청을 받고 마지 못해 환자를 받는 경우가 대부분으로 알려졌다. 

한국일보 특별취재 '대한민국 마약리포트'

어쩌면 마약은 가까운 곳에서 우리가 애써 외면했던 모습으로, 가장 잔인한 실체를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를테면 우연한 호기심에, 혹은 자포자기로 스스로를 망가트리려, 또는 극단의 쾌락을 맞볼 수 있다는 누군가의 꾐에 속아 파괴된 인생을 살아 가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 말이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마약 산업의 실체를 찾아 근절하는 노력만큼이나 이들의 이야기를 공유하고, 회복을 돕는 손길을 늘려 나가는 것이, 마약 비(非) 청정국인 우리의 또 다른 대안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요.

이상 [오리지너]였습니다.

조원일 기자 ㆍ김창선 PD ㆍ자료조사 박서영 ㆍ현유리 ㆍ박기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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