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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은영의 화해] 아버지처럼 술, 도박하는 남편과의 결혼 너무 후회돼요.

입력
2018.12.17 04:40
수정
2018.12.17 08:18
2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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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 한국일보]오은영의 화해 아버지처럼 술 도박하는 남편. 김경진기자
[저작권 한국일보]오은영의 화해 아버지처럼 술 도박하는 남편. 김경진기자

※ ‘오은영의 화해’는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인 오은영 박사가 <한국일보> 와 함께 진행하는 정신 상담 코너입니다.

저는 남편과 이혼하려 하고 있습니다. 직장 생활 중 건실해 보이는 남편을 만나 결혼했지만 결혼 직후에 남편이 음주 문제와 경제적인 문제가 있다는 걸 알게 됐어요. 갈등은 있었지만 아이를 낳고, 남편이 아이들을 잘 돌보면서 그럭저럭 지내왔습니다. 하지만 남편이 가족들 모르게 큰 돈을 대출 받아 주식으로 날린 사실을 알게 됐고, 그때부터 신뢰가 와장창 무너졌습니다. 그 빚은 모아두었던 돈으로 갚았지요. 이후에도 남편의 경제적인 문제는 계속 됐습니다. 남편은 또 대출을 받아 투자를 했습니다. 국내 한 카지노에서 도박을 한 사실도 확인했습니다.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남편은 생활비조차 주지 못하는 상태에 이르렀고, 도박을 하느라 집에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어요. 술을 마시고 크고 작은 사고를 치기도 했습니다. 초등학생인 아이들도 아빠와 점점 소원해졌습니다. 상황이 이런데도 남편은 그 동안 자신의 잘못에 대해 한번도 친절하게 설명하거나 사과를 한 적이 없습니다. 반성은커녕 오히려 저 때문이라고 변명을 하고 비난합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가 괴로운 것은 남편의 모습에서 아버지가 떠오른다는 겁니다. 술을 많이 마시고 잘못된 행동을 하고, 대출받아서 도박에 빠지는 것을 보면서 어쩌면 내 인생은 아버지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지난날 엄마와 똑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있습니다. 그럴 바엔 두 아이와 함께 자살하는 게 나을 것 같아요.

저는 나이가 많고 학력이 없는 부모의 세 딸 중 둘째로 태어났어요. 태어나자마자 딸이라는 이유로 아버지의 구박을 받은 기억도 납니다. 어렸을 적부터 아버지의 음주와 도박, 간헐적인 가정폭력을 보고 듣고 자랐어요. 어린 시절부터 그런 아버지가 수치스러웠고, 그런 아버지와 이혼하지 않고 대항하지 못하는 엄마에 대한 반감도 있었어요. 그래도 어릴 때부터 누가 시키지 않아도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동생도 제가 보살폈어요. 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했던 엄마가 딱해 물건 만드는 것도 많이 도왔어요. 정말 어렵게 대학까지 제 힘으로 마쳤어요. 대학을 나와야만 돈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예요. 그러다 스물 여섯 살쯤에 아버지를 가정폭력으로 경찰에 신고했어요. 그리고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않았지요. 5년 전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장례를 치르면서 아버지와의 관계는 완전히 끝났습니다.

결혼하기 전 남편은 내성적이지만 선한 성격이었어요. 직장에서 성실하다는 평가도 받았고, 가정적인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술과 도박에 빠지면서 사람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상태로 계속 살다가는 어린 딸들이 저와 같은 고통을 겪게 될 것만 같아 너무 괴로워요. 이혼 협의 중에 상담원이 남편에게 좀 더 노력해볼 것을 권했지만, 남편은 전혀 의지가 없습니다. 현재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 받아서 빚을 청산하고 혼자 외딴 섬으로 떠나고 싶다고 하네요. 양육비도 주지 못하겠지요. 이런 남편과 저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지만 아이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이혼 후에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합니다.

최미향(가명ㆍ42ㆍ회사원)

미향씨, 만약 예전에 어린 당신을 만났다면 나는 당신에게 ‘미향아 너의 잘못이 아니야, 부모를 선택할 수는 없으니까’라고 말해줬을 거에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의 문턱에 들어간 미향씨에게는 ‘부모와 정서적 물리적 거리를 두세요, 부모의 문제를 당신이 해결하거나 책임질 수는 없어요. 부모의 부모가 되려 하지 마세요’라고 말해줬을 거에요. 남편의 문제를 의논하러 저를 만나러 오셨다면 ‘이혼도 신중하게 고려해보세요’라고 조언했을 거예요.

당신이 살아온 인생을 보면서 당신은 참 현명하게 문제를 해결해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조언의 방향과 크게 다르지 않게 당신 스스로 결정하고 해결해 왔어요.그렇다면당신의 삶에서 안정감을 찾고 자기확신감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 당신이 이토록 괴로운 이유는 뭘까요. 삶을 포기하고 싶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이유는 어디에서 오는 걸까요. 속 썩이는 남편 때문일까요. 물론 이혼을 결심하기까지는 괴롭고 고민이 많겠지만 마음을 정하면 홀가분해지는 면도 있을 텐데요. 누구의 도움이나 조언 없이 스스로 현명하게 해결해 온 당신이 이 시점에서 저에게 조언을 구하러 상담을 신청하신 이유가 뭘까요. 그 이유가 바로 당신의 고통의 이유일 겁니다. 그건 미향씨가 스스로를 견디기 어렵고 당신의 삶을 받아들이기 어렵고 자신이 용서가 안되기 때문이지요. 물론 남편 때문에 유발된 문제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미향씨 자신이, 인생이, 현재의 이런 상황이 실망스럽고 억울하고 자신에게 화가 나고 우울하고 절망스러운 거겠지요.

어려운 환경을 극복하고, 아버지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이런 일련의 과정을 보면 미향씨는 매우 독립적이고 주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이건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아주 중요한 덕목이지요.

그런데 미향씨는 과도하게 독립적이고, 지나치게 주도적인 편인 것 같아요. 당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 보니 아마도 폭력적인 아버지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싶어요. 미향씨의 아버지는 폭력적이었고, 가까운 사람에게 해를 입혔어요. 비논리적이고 비이성적인 사람이었지요. 그래서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어요. 미향씨와 가족들은 그런 아버지에게 ‘왜 가족들을 힘들게 하세요’, ‘왜 저를괴롭히세요’ 라고 묻지도 못했어요. 그러다 보니 당신은 어린 시절부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라는 질문을 가슴 깊이 품고 살아왔을 겁니다.

엄마도 그런 당신을 보호해주지 못했어요. 폭력적인 아버지한테 휘둘려서 엄마도 힘이 들었겠지만, 자식이 힘들 때 보호해주지 못한 책임이 있지요. 폭력적인 아버지와 아무런 보호막이 돼 주지 못한 엄마 아래에서 미향씨는 지나치게 주도적이고 과도하게 독립적일 수밖에 없었을 거예요. ‘당신들은 나를 이끌어주지도, 보호하지도 못해요. 나는 내 뜻대로 나의 삶을 꾸려갈 거예요’라는 생각을 부모를 보며 쭉 해왔을 거예요. 아마 그런 생각을 붙들고 있었기 때문에 미향씨가 한편으론 내적인 힘을 가지고 불안정한 상황을 잘 극복해왔던 걸 거에요.

아버지의 장례까지 잘 치러낸 것은 당신이 책임감이 크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당신이 가족 문제에 있어 주도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하고 우위에 있어야 안심이 되기 때문인 것도 있을 거예요. 아마도 당신은 인정하기 어렵겠지만 그토록 주도적인 것은 정말 어린 시절에 부모로부터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았어야 할 애정이 부족해 이를 채우려는 욕구가 강해졌기 때문이예요. 이건 이제 와서 부모로부터사랑 받고 싶은 게 아니라 부모가 자기를 사랑으로 대해주기를 원하는 본능적 욕구가 당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다는 얘기예요. 이 욕구가 좌절되었을 때 결핍을 느끼고 사람들은 아주 큰 절망감과 허망함, 슬픔, 억울함을 느껴요. 독립적인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너무 이른 독립성, 너무 빨리 철이 드는 것은 이러한 의존적 욕구의 결핍이 크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당신은 이 결핍을 배우자가 채워주길 바랐을 거예요. 부모 다음으로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으니까요. 하지만 남편은 그러질 못했어요. 당신은 다시 한번 절망했을 거예요. 그리고 그 남편의 모습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아버지와 닮은 면을 발견했으니, 아마 당신은 남편을 선택한 자신에 대해 분노하고, 실망했을 거에요. 부모는 고를 수 없지만 남편은 당신이 선택했다는 사실이 견디기 힘들 수 있어요. 남편에 대한 분노와 실망이 아니라 미향씨 자기 자신에 대한 절망과 분노였을 거예요. 그래서 ‘남편과 어떻게 해야 할까요’가 아닌 ‘저는 이제 무엇을 믿고 살아갈까요’라고 절규하고 있는 당신이 너무나 가엾습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미향씨, 그런데 당신의 선택에 너무 좌절하거나 분노하지 말아요. 죽음까지 각오하지 마세요. 보통 배우자를 고르거나 만날 때 모든 것을 전제하고 선택할 수 없어요. 당신이 아무리 조심하고, 깊이 생각했었어도 남편의 문제를 결혼하기 이전에 처음부터 알아챌 수 없었을 거에요. 그건 모든 사람이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은 매우 순진하고 착한 사람이었을 거예요. 당신은 그런 남편이 아버지처럼 당신을 공격하거나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믿었을 거에요. 그런데 이 남편은 생각보다 약하고 여려서 문제가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해결할 줄을 몰랐을 거에요. 이런 사람들은 술과 도박에 쉽게 빠져들어요.

그래서 당신으로 하여금 아버지를 떠올리게 하는 괴로운 남편이지만, 남편은 아버지와는 다른 사람이예요. 당신이 엄마처럼 살지 않을까 두려워할 필요도 없어요. 당신은 엄마와 다른 사람이예요. 엄마처럼 나약하지도 쉽게 휘둘리지도 않아요. 당신은 당신의 아이들을 지켜낼 힘을 가지고 있어요. 그리고 당신이 엄마의 모자란 부분을 잘 알고 있으니, 그런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을 것을 저는 알고 있어요. 그래서 당신의 딸들은 당신의 어린 시절과 절대로 같지 않을 겁니다. 당신의 엄마가 채워주지 못했던 아쉬웠던 것을 당신은 당신의 딸들에게 해줄 수 있어요. 그러니 자책하지 말고, 걱정도 하지 마세요. 당신의 딸에게 당신만큼 소중한 사람은 없어요. 당신은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훌륭합니다. 당신이 폭력적인 아버지에게 휘둘리지 않는 엄마를 기대했듯이 당신은 당신의 딸에게 그런 엄마가 돼 줄 수 있을 거예요. 미향씨 살아남으세요. 두 아이의 엄마로서 이미 당신은 위대하고 존귀한 존재입니다.

이혼을 결정하면 아이들에게 솔직하게 말하세요. 혹시 당신은 어릴 때 폭력적인 아버지로부터 엄마가 이혼을 했다면 좀 더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나요. 아이들에게 상황을 이야기한다면 아이들도 천천히 수긍할 수 있을 겁니다. ‘아빠와 엄마가 사랑해서 너희들을 낳았고, 여전히 너희들을 사랑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사람이 병에 걸리듯 아빠는 술을 많이 마시고, 도박을 해서 병을 앓고 있다. 그러니 아빠는 병을 고치는 데 좀 더 집중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따로 사는 게 좋다고 결정했다’라고 분명하게 알려주세요.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미향씨, 당신은 지나치게 주도적인 사람이므로 당신의 결혼이, 아니 그것보다 오롯이 당신이 한 배우자의 선택이 실패했다고 인정하기가 어려웠을 거에요. 그래서 스스로 판단해서 마음을 접을 시간이 필요할 거에요. 머리로 모르는 게 아니라 마음이 준비가 덜 된 거였겠죠.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할 시간과 충분히 납득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더 이상 자신을 탓하고 자신에게 분노하지 마세요. 당신은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입니다.

정리=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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