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살 터울 자매는 18년간 떨어져 지냈다. 발달장애를 지닌 동생 혜정은 열세 살 때 장애인복지시설로 보내져 서른 살이 되도록 그곳에서 살았다. 언니 혜영은 긴 시간이 흐르고서야 비로소 깨닫는다. 동생이 스스로 그런 삶을 택한 적이 없다는 것을. 혜영은 동생 혜정을 시설에서 데려와 함께 살기로 한다.
서울 거주 최소 6개월. 서울시가 지원하는 장애인 복지 혜택을 받기 위해 필요한 조건이다. 경기도에서 서울로 막 이사한 자매는 그 6개월을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감당해야 할 일이라면 더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이야기 형태로 만들어서 이런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리면 어떨까.” 다큐멘터리 영화 ‘어른이 되면’(13일 개봉)은 그렇게 시작됐다.
함께 산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은 자매의 동거는 순탄치 않았다. 제 멋대로인 혜정은 통제되지 않았고, 혜영은 그런 동생 때문에 조급했다. 흥이 많은 혜정을 장애인야학 음악수업에도 데려갔지만 혜정은 홀로 겉돌기만 했다. 음악이 다 같은 음악이 아니라는 걸, 혜정에게도 명확한 취향이 있다는 걸, 혜영은 그제야 알게 된다. 서로를 충분히 알지 못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인 자매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오롯하게 둘만의 시간을 쌓아간다.
혜영의 친구인 음악감독 인서는 혜정에게 음악 과외를 해 준다. 한 자리에 앉아 있는 것도 어려워하던 혜정은 조금씩 인서의 기타에 박자를 맞추기 시작한다. 언니 혜영의 도움을 받아 밥솥에 밥을 해 보기도 하고, 스스로 방도 치운다. 혜영이 지방 출장을 갔을 때는 인서와 촬영감독 정민, 촬영 스태프 은경과 여행도 했다. 혜정은 그렇게 세상 속으로 한 걸음 내딛는다.
영화 제목은 혜정의 중얼거림에서 비롯됐다. 무언가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때 혜정은 “어른이 되면 할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시설에 머물던 시절 혜정이 늘 듣고 지낸 말이었다. ‘어른이 되면’이라는 제목에는 혜정이 장애인이라서 포기해야 했던 꿈과 장애를 대하는 우리의 그릇된 태도가 담겨 있다.
혜영과 혜정이 꾸려가는 삶에는 공적인 손길이 닿지 않는다. 시스템이 없지는 않지만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자매에게 힘이 되는 건, 가족과 지인의 편견 없는 선의와 온정이다. 혜영 혜정 자매와 친구들이 함께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떠들썩하게 어울리는 소소한 일상에는 장애와 비장애의 경계가 없다. 공존이란 단어도 떠오르지 않을 만큼 자연스럽고 당연해서 도리어 장애인 인권과 부실한 복지 시스템을 환기한다.
6개월간의 동거에서 달라진 건 많지 않다. 혜영은 동생을 돌보면서 쉼 없이 잔소리를 하고, 혜정은 커피와 트로트 노래와 스티커사진 찍기 같은 좋아하는 일에는 여전히 고집불통이다. 하지만 자매에겐 지금까지 함께한 시간보다 앞으로 함께 만들어가야 할 시간이 더 많이 남아 있다. 그 시간이 조금 더 행복해질 거라는 바람과 기대에 이제는 우리 사회가 답해야 할 차례다.
‘생각많은 둘째 언니’라는 유튜브 채널 운영자로도 유명한 혜영은 이 다큐멘터리를 연출하고 삽입곡도 직접 만들어 불렀다. 그중에서도 자매의 연말 공연곡인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라는 곡이 가슴을 뭉클하게 울린다. '무사히 할머니가 될 수 있을까, 죽임당하지 않고 죽이지도 않고서, 굶어 죽지도 굶기지도 않으며,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나이를 먹는 것은 두렵지 않아, 상냥함을 잃어가는 것이 두려울 뿐… 언젠가 정말 할머니가 된다면, 할머니가 됐을 네 손을 잡고서, 우리가 좋아한 그 가게에 앉아 오늘 처음 이 별에 온 외계인들처럼 웃을 거야.’
무사히 할머니가 된 자매의 이야기를 먼 훗날에 다시 만나고 싶다.
강추 : 혼자 살기도 힘든 세상에 함께 살기를 포기하지 않는 자매의 삶을 응원하고 싶다면. 그 응원으로 관객 또한 위로 받고 싶다면.
비추 : 전국에 몇 곳 없는 상영관을 찾아가는 게 수고롭게 느껴진다면.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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