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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로 역주행한 윤흥길 “다시는 이런 소설 못 쓸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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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로 역주행한 윤흥길 “다시는 이런 소설 못 쓸 것...”

입력
2018.12.14 04:40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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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년 공들여 쓴 대작 소설 ‘문신’ 출간 

윤흥길 작가는 얼마 전 ‘문신’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아내 유경순씨를 “48년째 연애 중인 애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권위를 과장하는 거장이 아니었다. “독자들이 ‘문신’에서 미흡함이나 한계를 느낀다면, 대하소설이나 긴 장편소설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 윤흥길의 미흡함과 한계다.” 문학동네 제공
윤흥길 작가는 얼마 전 ‘문신’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아내 유경순씨를 “48년째 연애 중인 애인”이라고 불렀다. 그는 권위를 과장하는 거장이 아니었다. “독자들이 ‘문신’에서 미흡함이나 한계를 느낀다면, 대하소설이나 긴 장편소설의 문제가 아니다. 작가 윤흥길의 미흡함과 한계다.” 문학동네 제공

“열중한 나머지 고무줄이 끊어져 아랫도리가 흘러내린 줄도 모르고 링 위에서 무작정 팔만 휘두른 복서가 있다면 그는 아마 지금의 나만큼이나 부끄러웠을 게다. 시원찮은 솜씨만 보여서 관중들을 볼 면목이 없다. 하지만 나는 아직 젊고 그리고 고집이라는 무기가 있다. 앞으로는 잘 듣는 펀치가 어느 쪽인지를 알아서 더욱 날카롭게 가다듬고….”(1968년 1월 5일자 한국일보)

그 해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 소감이다. 글 쓴 이는 전북 부안군 진서국민학교 교사 윤흥길. 그는 다짐을 지켰다. 50년간 뚝심으로 썼다. 등단작 ‘회색 면류관의 계절’에 이어 ‘장마’ ‘아홉 켤레의 구두로 남은 사내’ ‘완장’ 등으로 한국문학사에 이름을 장장 새겼다.

등단 50년, 76세가 된 윤흥길 작가가 새 소설 ‘문신’을 냈다. 스스로 “남은 생에 다시 이런 작품은 쓰지 못할 것”이라고 한 다섯 권짜리 대형 장편이다. 쓰고 내는 데 20년이 걸렸다. “그 동안 쓴 것 중에 가장 많은 시간과 힘이 들어갔다.” 그러고도 다 고쳐 쓰지 못해 세 권만 먼저 냈다. 두 권은 내년에 낸다.

‘나’를 향해 작아지거나 먼 미래로 가는 게 요즘 젊은 소설의 흐름. 윤 작가는 그걸 거부했다. 일제 말기로 돌아갔다. 얼마 전 기자간담회에서 윤 작가 스스로 “낡은 주제”라고 부른, 익숙한 이야기다. “우리 소설이 경박단소(가볍고 얇고 짧고 작음)로 일제히 달려가고 있다. 모노 컬러(무채색) 같은 현상이 문학을 왜소화시키고 궁핍화시킨다. 남들이 찾지 않고 추구하지 않는 것도 내 나이에 쓸 필요가 있다는 생각에 시대를 역주행했다.”

소설은 전라북도 ‘산서’라는 마을에서 벌어지는 인간 사냥 장면으로 시작한다. ‘모집’이라 거짓 이름 붙인 강제 징용에 장정들이 끌려 간 참혹한 밤. 주인공인 천석꾼 대지주 최명배와 최씨성을 쓰는 친족들은 살아남는다. 친일의 공로로 최명배가 미리 정보를 얻은 덕이다. 최명배가 섬기는 건 단 두 가지. ‘목숨부지’와 ‘입신양명’이다. “나이셍잇따이(내선일체) 고오꼬꾸신밍(황국신민)”을 주문처럼 외는 비굴함으로 목숨은 지킨다. 수재인 아들 부용과 귀용을 아낌 없이 교육시켜 입신도 이루려 하지만, 뜻대로 되지 않는다. 부용은 허약한 스타일리스트이고, 귀용은 아버지 은혜를 원수로 갚으려 하는 사회주의자다. 한 몸일 수 없는 최씨 집안이 “환란으로 날이 밝고 환란으로 날이 저무는” 시대를 통과하며 겪는 곡절이 소설의 줄기다.

윤 작가는 원래 10권 이상 분량으로 구상한 긴 소설을 “플롯(구성∙스토리) 메모 한 장 없이” 썼다고 한다. 이야기를 넓게 펼치지 않아서다. ‘최씨 가족 수난사’ 라는 말이 소설에 딱 맞다. 윤 작가는 캐릭터를 살리는 데 필력을 쏟아 부었다. “짧게 짧게 등장하는 인물에게도 힘을 많이 썼다. 성격과 언어 특성을 모든 인물에 맞게 따로 만들었고, 특히 최명배에게 많은 공을 들였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인 윤흥길 작가의 ‘회색 면류관의 계절’과 당선 소감이 실린 한국일보 지면. 가운데 사진이 윤 작가다.
196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당선작인 윤흥길 작가의 ‘회색 면류관의 계절’과 당선 소감이 실린 한국일보 지면. 가운데 사진이 윤 작가다.

‘문신’의 미덕은 이야기보다 어쩌면 문장이다. 푸지고 때로 외설스러운 토속어의 향연이 벌어진다. 눈으로 글을 읽는 동안 판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문장, 어휘, 수사법에 치중했다. 판소리 율조에 가까워지려고 토씨를 생략하는 시도도 많이 했다. 이전엔 거리에 떠도는 말들을 절제하고 가독성과 타협했는데, 이번엔 독자 눈치 보지 않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이를테면 이런 대목이다. “제딴은 흉당 안에 팥죽 끓듯 육도삼략이 들끓고 있노라 자부할지 몰라도 겉보기로는 된서리 맞고 시르죽은 율모기처럼 맥없이 느껴지는 지질컹이라고 치부해 나온 진용이었다”(1권) “그쯤에서 야마니시 영감은 큰기침에 암냥해서 가래침을 타구 속에 칵 뱉음으로써 늙은 아비 구닥다리 목청을 천석꾼 대지주 위엄에 걸맞은 신품 목청으로 개비했다”(2권) ‘껑더리되어’ ‘직수굿이’ ‘텀턱시럽고’ ‘뽈딱’ 관디벗김’ ‘문칮문칮’ ‘겨끔내기’ 같은 귀한 우리말, 사투리가 문장 리듬과 한 몸이 된다. “우리 것을 되찾을 순 없지만 완전히 잊어버리진 말자는 메시지를 전하고자 했다. 국어사전을 끼고 살며 매일 새 단어를 익혔다. 요즘도 어휘를 공부한다.”

“가끔 내가 이 정도밖에 못 쓰나, 하는 자괴감이 들 때까지 있었다.” 윤 작가는 거장임을 과시하지 않았다. 그는 언젠가부터 ‘촌스러운 말’이라는 꼬리표가 붙고 만 ‘노력’을 강조했다. “1980년대 초 CT(컴퓨터단층촬영)를 찍었다. 의사가 ‘선생님처럼 창조적인 일을 하는 분들은 전두엽이 굉장히 발달돼 있다고 하는데, 선생님은 보통 사람들과 크기가 같다’고 했다. 발끈했다. 천재가 아니고 범재라는 판정이니까.” 그리고 반전. “그 판정을 받은 뒤로 중요한 작품을 많이 썼다. 모자라는 천재성을 보완하려고 많은 걸 희생했다. 오로지 창작에만 전념하려고 노력했다. 천재라고 우러러 봤던 문단 선배들이 오히려 일찍 절필하는 걸 많이 봤다. 소설에서 재능보다 중요한 건 노력이다. 후배 작가들이 그걸 기억해 주면 좋겠다.”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문신 1∙2∙3(전 5권) 

 윤흥길 지음 

 문학동네 발행∙408,408,400쪽∙각 1만4,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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