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화 시인 생가 뒤뜰 200살 라일락에 반하다
골목 끝이 환하다. 도심 복판 이제는 버려져 누구도 돌아보지 않는 비밀인 듯 어둑한 골목. 구태여 오래 외진 골목 끝에 누가 환한 마음의 심지 돋워 꽃등을 걸었다. 이 골목에 라일락꽃 피기 시작한 지 200년, 시인이 태어난 지 117년이다. 전설 같은 골목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시인은라일락꽃 막 피던 1901년 음력 4월 5일 이 골목 생가에 와서 라일락꽃 흐드러지던 1943년 4월 25일 이웃동네 고택에서 돌아갔다. 꽃이 꽃 피던 시절을 말해줄 리 없고, 시인이 태어난 곳 지도를 그려 남길 일도 없다. 그래도 그렇지. 상화(尙火) 생가가 흐릿해져 고택이 생가로 여겨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하자. 하물며 생가 옆 200년 된 라일락나무를 제대로 알아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지독한 근시와 청맹과니들 사는 도시에 라일락 꽃빛, 꽃내음만 해마다 무성했다.
▲2년 전 골목투어 때 만나 한눈에 반해
“상화 고택이 생가인 줄 알았습니다. 고택은 상화가 돌아가시기 전 4년 동안 기거한 곳이고, 이곳 생가에서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더라고요. 그걸 알고서 아차 싶었다면, 저 라일락나무를 보고서는 뒤통수를 한대 맞은 것 같았습니다.”
권도훈 ‘라일락뜨락 1956’ 대표는 2년 전 근대골목 투어에 참가했다. 상화 생가 뒤 빈 한옥에 이르러 라일락나무를 만나는 순간 그의 운명 하나가 정해졌다. “원래 식물 키우는 걸 좋아했지만, 라일락나무를 보자마자 그렇게 좋았습니다. 라일락나무와 나무의 공간을 어떻게든 살리고 싶었습니다.”
그의 첫인상은 TV에서 자주 보는 탤런트를 닮았다.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를 가진 그는 ‘좋아하는 몇 가지’를 이룬 사람이다. “커피가 좋았습니다. 2년 전부터 커피를 배웠습니다. 저의 디자인사무실에서 손님들에게 커피를 직접 내려줬죠. 손님들이 커피가 맛있다고 하더라고요. 이왕이면 카페를 하고 싶었습니다. 마음을 정하고 바리스타 교육까지 마쳤어요.” 그러던 차에 라일락나무를 만났다. 한눈에 나무에 반한 그는 백방으로 애써 ‘라일락나무 집’을 사들였다. 6개월 동안 리모델링 공사를 했다. 한옥 리모델링을 전문으로 하는 친구 디자이너에게 맡겼다.
라일락나무는 세월의 무게를 지탱하느라 어른 키만큼 길게 누웠다. “이 집의 주인은 최연장자인 이 나무예요. 라일락나무를 잘 살려가고 싶습니다. 나무 밑동 주변에는 작은 정원(작은 폭포)을 꾸몄고 중간을 돌아나가는 물길을 냈습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이 물소리가 들린다. 얼핏 먼 파도소리 같다. “한옥의 원형을 살리되 구조적 불편함과 묵은 때는 과감히 벗겨냈습니다. 천장에 노출된 거친 흙을 비롯해 상당 부분은 옛 흔적대로 남겨뒀습니다.” 건물의 역사성, 공간의 시간성에 대한 배려다. 한옥의 고아함에 모던한 건축미가 한 몸처럼 화음을 이루며 집 안팎을 흐른다. 둘러볼수록 집 주인이 디자이너라는 것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다.
▲편안함과 시원함, 단순함과 섬세함…
덕분에 손님들은 그리 넓지 않은 실내에 앉아 호사를 누린다. 어디서든 마당의 라일락나무와 하늘을 바라다 볼 수 있게 ㄷ자 건물의 전면은 통유리다. 편안함과 시원함이, 단순한 아름다움과 섬세한 손길이 오감에 닿는다. “카페로 들어오는 골목 양쪽 담벼락에는 직접 벽화를 그렸습니다. 물론 상화 초상을 그리는 데 가장 많은 고민을 했죠. 조금씩 더 미소를 짓는 4컷으로 그렸습니다. 체게바라 초상처럼 단순화한 선과 색상 대비로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싶었어요. 지저분한 골목 담벽에 꽃그림과 캐릭터를 그렸더니, 처음엔 무뚝뚝하던 이웃 어르신들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카페 ‘라일락뜨락 1956’은 지난 10월 말 문을 열었다. “공사를 시작하면서 맨 처음 한 일이 브랜드 이름짓기입니다. 직업이 시각디자이너이다 보니까 그 부분이 해결이 안 되면 공사의 기본 구상(개념)이 안 생기겠더라구요. 브랜드 심벌의 모티브는 꽃 핀 라일락 고목으로 잡았고 로고타입은 캘리그래피로 직접 작업했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라일락나무의 건강 상태와 나이였습니다. 평소 알고 지내던 이재숙(한국분재협회중앙회 부회장) 박사께 물어봤습니다. 수령 150~200년 정도 추정된다고 하시더군요. 정확한 나이를 알려면 나무에 구멍을 내서 나이테를 확인해야 된다는데 나무가 상할 것 같아서 그렇게까진 하지말자고 했습니다.”
나무 아래 물길을 내는 일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처음 물길 공사를 하고서 한 달쯤 지나자 나뭇가지 하나가 시들더니 말라버렸습니다. 공립 나무병원에 문의했더니 사진 상으로 진단하고는 뿌리 부근 돌을 제거하고 지켜보자고 했습니다. 차도가 없어 민간 나무병원에 다시 문의했습니다. 담당자가 와서 나무뿌리 근처에 두 군데 구멍을 뚫고 영양제를 놓고 갔습니다. 역시 별 차도가 없더라고요.”
▲나무 아래 물길내기 공사가 ‘큰일’이 된 사연
“이재숙 박사에게 도움을 청했더니 전문가 한 분을 소개시켜 주었어요. 전문가 진단은 물길 작업 때 시멘트를 사용한 것이 문제라면서 시멘트 구조물을 다 치우고 시멘트 성분이 스며든 뿌리 주변 흙까지 전부 걷어낸 뒤 물길을 다시 만들어야 한다는 거였어요. 일이 아주 커진 거죠. 추가 비용에 공기에…. 어쨌든 그랬더니 나무가 살아났어요. 라일락나무 지기가 되기 위한 비싼 수업료를 낸 셈이죠.” 이런저런 일들로 15
개업은 석 달이나 미뤄졌다. 그는 수령 200년의 상화 생가 라일락나무 지키는 일을 스스로 떠맡아 청지기가 됐다.
카페 안채 북편 쪽문을 열면 바로 시멘트 블록담이다. 삭막하고 진부한 담벽 공간에 그는 실물 플루트와 트럼펫을 걸었다. 공중식물인 틸란드시아를 함께 장식했다. 잘 짜인 공간이 흔히 그러하듯 시멘트 블록담장에서 리듬과 선율이 느껴진다. “투박하게 갈라진 시멘트 벽돌을 뚫고 싱그러운 음악소리가 나는 것 같아요. 담장 위로는 길고양이가 다녀요. 친구가 됐지요.” 그는 건물 밖 블록 담장에다 생음악이 들릴 듯 어쩌다 길고양이가 완성하는 풍경 하나를 만들었다.
풍경에 눈이 빼앗겨 언제 고양이가 담장 위를 지나나 지켜보다가, 그가 내려준 커피는 식어버렸다. 그리 아쉬워 할 것은 없다. 식어도 향과 맛은 식지 않은 괜찮은 커피를 오랜만에 마셨다. 유자차나 자몽차는 유자와 자몽을 바로 갈아 낸 원액이다. 오미자차는 그의 고향 영양 마을사람이 재배한 오미자를 받아 만든다. 저녁에는 수제맥주와 와인을 판다. 많은 사람들의 입맛 검증을 거친 대구의 ‘대표적 브랜드’라고 그가 소개했다. 요가원을 경영하는 아내가 파트타임으로 돕는다. 그의 부부가 구워내는 맥주 안주 피자는 치즈 맛부터 담백하다. 점심 손님이 많아서 브런치 메뉴를 내놓을 계획이다.
▲라일락나무 아래 ‘첫사랑 고백’ 이벤트 준비
라일락의 꽃말은 ‘첫사랑’, ‘젊은 날의 추억’. 카페는 200년 된 라일락 고목 아래 ‘첫사랑 고백’ 이벤트를 준비 중이다. 라일락나무의 배경인 담벼락이 통째로 스크린이다. 남자 친구가 여자 친구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온 사랑 고백 영상이 담장 스크린을 가득 메운다. 시인이 거닐었을 200년 된 라일락 꽃그늘 아래 사랑하는 이에게 꽃다발을 바치는 고백은 상상만으로도 낭만적이다. 라일락꽃 흐드러지고 꽃구름 일듯 향기 흩날리는 4~5월의 사랑 고백은 또 눈부시지 않을까.
상화의 시는 ‘무엇에 대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무엇’이었다. 일제 강점기 순정하고 기개에 찬 언어가 이를 수 있는 최고 절창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1926년)와 「나의 침실로」(1923년)의 사이 또는 바깥에서 그의 시는 어느 한쪽이 아니라 양쪽 다였고 어느 한쪽으로는 오를 수 없는 큰 산이었다. 그가 돌아간 지 75년. 식민지 유산 청산과 친일의 문제가 아직도 진행형인 지금 그가 남긴 68편 시를 다시 읽으면 그의 시는 여전히 떨림판을 다 떨어버리지 못한 악기처럼 강력한 에너지를 내장한 채 우리 곁을 서성인다.
비록 상화의 시에서 라일락꽃이나수수꽃다리, 개회나무라는 시어는 찾아볼 수 없지만 라일락은 시인의 집 마당에서 봄마다 꽃그늘을 이루며 시편의 보이지 않는 재료가 되었을 것이다. 200년 된 이 라일락나무를 정작 제대로 찾아내고 길을 낸 사람. 우리 문학과 문화에 대한 권 대표의 예민한 감각과 밝은 눈이 고맙고 놀랍다. 그동안 왜 누구도 이 나무의 존재를 제대로 알거나 밝히지 못했을까. 대구 근대 문화 지형도에서 이 나무는 몇 번째 손에 꼽을 만큼 상징성이 뛰어나 보인다. 상화의 라일락나무는 그 연륜만큼이나 많은 사연을 간직하고 있을 것이다. 그 수많은 이야기를 찾아내 지키고 꽃피워 우리 문화를 깊어지게 하는 일은 그만이 아니라 대구 시민 모두의 몫이다.
▲“모두가 함께하는 문화공간, 잘 지켜갈게요”
그는 어릴 때부터 그림을 아주 잘 그렸다. 고교 때는 친구들이 대부분 그에게 미술 숙제를 맡겼다. 미대 진학을 꿈꾸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디자인 쪽으로 진로를 바꿨다. 카페 지기가 된 그는 오래 미뤄둔 그림에 대한 꿈을 꺼내 보인다. 그와 얘기를 나누다 보면 그가 앞으로 더 의미 있는 많은 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믿음 같은 게 생긴다.
“라일락꽃 피는 4~5월에 어린이나 청소년 백일장도 열고 싶습니다. 상화와 200년 라일락을 주제로 하는 글쓰기와 그림그리기 대회를 학교, 기관 등과 함께 여는 거죠. 아이들이 라일락 나무 아래서 상화와 같은 마음으로 시를 쓸 수 있도록 하고 싶습니다. 많은 분들이 도와주셔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라일락뜨락 1956’은 저 개인만의 공간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문화 공간입니다. 잘 지켜 가겠습니다. 늘 지켜보고 늘 함께해 주십시오.”
김윤곤 기자 seou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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