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결단력이 놀랍다” “승부사 기질이 있다”는 등 그동안 여러 학자들의 그럴 듯한 분석이 쏟아졌다. 우리나라 박종진 만년필연구소 소장은 소소하고 재밌는 해석을 내놨다. 이들이 쓰는 필기구에 주목한 것이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평화의 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때 김 위원장은 방문록에 서명하면서 만년필이 아닌 펠트팁 펜을 사용했다. 보통 사인펜이라고 부르는 수성 잉크 펜이다. 공교롭게 트럼프 대통령도 법안에 서명할 때 만년필이 아닌 펠트팁 펜을 잘 쓴다. 지난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정상회담에서 두 사람은 모두 펠트팁 펜을 사용했다. 펠트팁 펜은 만년필이나 볼펜으로 쓴 것보다 진하고 굵어 눈에 확 들어온다. 전세계의 이목이 집중된 자리에서 두 사람은 선명한 펠트팁 펜으로 존재감을 드러냈다는 분석이다.
약 40년간 만년필을 수집한 저자의 눈에 만년필은 시대 배경과 역사가 녹아 있는 “인문의 흔적”이다. 시인 박목월,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 영국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쓴 만년필의 실체를 추적하면서 역사적 사건을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된다. 만년필에 관한 탐구는 점점 더 깊이 있게 전개돼 급기야 영화 ‘캡틴 아메리카: 시빌 워’를 보고 미국 대통령의 만년필 사용 전통까지 조사하는 경지에 이른다.
만년필 탐심
박종진 지음
틈새책방 발행·256쪽·1만5,000원
역사적 탐구를 마치고 나면 만년필에 깃든 인간사가 이어진다. 만년필을 찾아 벼룩시장을 헤매고, 골방에서 하루종일 만년필을 분해한 기억들이 소박하다. 이를테면 한 손님은 45년 전 누나가 물려준 만년필 파커21을 들고 왔다가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직원의 말에 실망해 돌아갔다. 저자는 다시 손님에게 연락해 만년필을 수리해줬고, 기뻐하는 손님의 표정을 보며 자신이 수리한 것은 만년필이 아니라 누군가의 소중한 추억임을 깨닫는다.
중간중간 실용적인 만년필 수집 팁도 끼워 넣었다. 펠리칸 M800, 마키에 만년필, 파커51, 몽블랑149 등 다양한 모델 중 좋은 제품을 고르는 법과 벼룩시장 구매 법을 알기 쉽게 설명했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서랍 안에 굴러다니던 부모님의 낡은 만년필을 다시 볼 수 있겠다. 알고 보면 가치를 가늠할 수 없는 귀중한 역사와 추억이 녹아 있을지도 모른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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