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칫했다면 영문도 모르고 깔려 죽을 뻔했습니다.”
2017년부터 서울 강남구 삼성동 테헤란로 대종빌딩 15층에 입주한 무역업체 부사장 김형복(61)씨는 12일 오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13일 0시 부로 건물 전체 사용금지’라는 소식을 들은 것. 빌딩 2층 중앙 기둥에 생긴 심한 균열로 내력(하중을 견디는 힘)이 손상되자 서울 강남구가 내린 결정이다. 15층 사무실에서 기자와 만난 김씨는 “보상도 없이 당장 건물에서 나가라고만 하는데, 이곳을 나가면 그간 쌓아온 것이 모두 무너진다”라면서도 “지금 건물이 흔들리는 것 같다”고 불안을 숨기지 않았다.
오후부터 건물은 컴퓨터 등 필수물품을 급히 빼내려는 사람들로 분주했다. 부피가 큰 가구나 개인 물품은 차마 가져갈 엄두도 내지 못했다. 짐을 옮기면서도 혹시나 많은 사람이 내는 진동에 큰일이 발생하지 않을까 노심초사했다.
대종빌딩은 사무실 98곳을 비롯해 수협은행 지점과 근린생활시설 등이 들어선 오피스텔건물이다. 입주자만 100여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강남구는 현재 정확한 피해 인원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기둥 균열은 지난달 26일 새로 입주하는 업체가 2층에서 인테리어공사를 하던 중 발견했다. 이후 이달 8일 건물주가 안전진단업체에 안전점검을 의뢰, 기둥 외피를 제거하던 중 균열이 위층까지 확산됐다. 건물에 있던 사람들은 “큰 소음과 함께 강진이 발생한 듯 건물이 심하게 흔들렸다”고 당시를 기억했다. 신고를 받은 강남구는 11일부터 이틀간 긴급 안전점검을 실시했고, 재난 발생 위험이 높은 제3종 시설물로 지정해 사용금지 조치를 내렸다.
균열 원인은 부실 시공이 유력해 보인다. 설계도 무시했다. 최장식 한양대 건축공학부 교수 등 전문가들은 긴급 점검에서, 사각형인 설계와 달리 기둥이 원형으로 시공된 사실을 확인했다. 건물이 올라갔던 1991년 당시부터 내력이 설계대비 80% 수준에 불과했던 것이다. 더욱이 철근 결합과 외피에도 결함이 있어 30년 가까이 건물이 유지되며 기둥 내력이 50% 이하로 떨어진 것으로 진단됐다. 박중섭 강남구 건축과장은 “시공 당시 시멘트 파동 등 건축업계가 어려운 시절이라 부실로 지어진 것 같다”라며 “기둥 주변에 버팀 지지대를 설치하는 등 보강 조치를 시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다행히 위험천만한 상황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당국의 관리 부실이 큰 화를 부를 뻔했다. 올해 두 차례 이뤄진 안전점검(2월 건물주, 3월 강남구)은 육안으로 이뤄져 균열을 발견하지 못했다. 특히 3월 대종빌딩에 안전등급(A~E) 중 B등급(양호)을 줬던 강남구는 이번에 신고를 받고 실시한 안전점검에선 ‘즉각 사용금지’에 해당하는 E등급(불량)을 내렸다. 심지어 강남구는 건물에 문제가 있다는 주민 민원을 지난달 균열 발견 직후 접수했으나, 민간 건물이니 자체 안전점검을 하라는 답변만 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한마디로 안이하고 무책임했던 것이다.
입주자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지난해 12월 입주해 해외법인 한국지사 사무실을 운영하던 정창덕(50)씨는 “당장 내일부터 어디서 일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며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만 100만원에 달하는 곳이 부실 건물이라고는 상상하지도 못했다”고 토로했다. 입주자들이 이날 주민설명회에서 보상을 요구했으나, 강남구는 민간 소유인데다 재난으로 발생한 문제가 아닌 탓에 불가능하다고 답했다.
강진구 기자 realn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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