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탄핵 2년 태극기집회서 유승민 등 ‘탄핵 7적’ 번호 공개
모르는 번호에 밤낮없이 시달려… “의정활동에 큰 지장” 고통 호소
평소 갖가지 민원의 홍수 속에 일상을 사는 국회의원들이 이번엔 복병을 만나 떨고 있다. 도발적이고 공세적인 지지층이 공포의 대상이다.
자유한국당 소속의 한 의원은 요즘 식사시간 대화에 잘 집중하지 못한다. 이 주 들어 쉴새 없이 울려대는 휴대폰 때문이다. 발신자를 알 수 없는 전화는 받지 않고 있지만, 일일이 수신 거부를 누르는 데만도 적잖은 시간이 든다. 외부 인사들과 갖는 오찬과 만찬, 중요한 대화 순간 맥이 끊기고 만다. 이 의원은 “의정활동에 지장이 커 조만간 번호를 바꿔야 할 것 같다”고 토로했다.
여의도에서 잔뼈가 굵은 배짱 두둑한 정치인들이지만 이런 원초적인 시달림엔 장사가 없다. 보수대통합부터 원내사항까지 정국구상의 틈을 주지 않는다. 아무래도 생각이나 행동도 수세적이고 방어적이 되기 마련이다.
바른미래당 소속인 일부 의원들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최근 한 중진 의원에게 전화를 건 이들은 “계속 통화중이라 연결이 어렵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의 휴대폰에도 전화가 종일 걸려오고 있는 탓이다. 의원들은 고통과 억울함을 주변에 호소하고 있다.
12일 야권에 따르면 최근 일부 의원들이 전화와 문자 폭탄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모르는 번호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연락이 쏟아지는 것은 물론, 전화를 받으면 다짜고짜 욕설을 퍼붓는 경우도 부쩍 늘었다고 한다.
발단은 지난 8일 열린 태극기 집회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2년(9일)을 맞아 서울 광화문일대에서 진행된 집회에서 대한애국당 당원들을 비롯한 집회 참가자들은 이른바 ‘탄핵 7적’의 사진을 불태우는 화형식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들이 꼽는 7적은 김무성ㆍ정진석ㆍ권성동ㆍ김성태(이상 한국당) 의원과 유승민ㆍ이혜훈ㆍ하태경(이상 바른미래당) 의원으로,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여론 등을 불법으로 조작해 탄핵을 주동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날 집회에서는 특히 이들 의원의 휴대폰 번호도 공개된 것으로 알려졌다. 최근 이들 의원들을 중심으로 전화 및 문자가 빗발치는 이유다.
정치인을 향한 전화ㆍ문자공세는 2016년 말 박 전 대통령 탄핵소추안 국회 표결을 전후로 의원들의 휴대폰 번호가 인터넷에 집단 유출됐던 때가 시발점으로 꼽힌다. 당시 탄핵에 반대했던 의원들은 찬성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연락이, 찬성 의원들은 보수를 분열시켰다는 비난 연락이 쇄도해 곤욕을 치렀다. 이후 전화ㆍ문자폭탄이 일반화하면서 정치권에서는 규제 필요성이 제기되기도 했으나, 유권자들의 표현의 자유를 저해할 수 있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아 논의가 진전되지는 못했다.
지난 11일 나경원 신임 원내대표가 선출되며 한국당 안팎에서는 태극기 부대까지 아우르는 보수대통합 가능성이 제기된다. 앞서 나 원내대표가 “안철수 전 의원부터 조원진 대한애국당 의원까지 연대 또는 통합의 범위에 들어간다”고 밝히면서다. 그러나 일부 강성 태극기 부대는 “탄핵 7적을 먼저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서 완전한 통합은 어렵지 않겠느냐는 전망도 비등하다.
이서희 기자 sh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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