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21>전사가 된 학자 이나영 
이나영 교수의 손에 총을 들렸다. “사회의 모든 차별에 맞선다는 느낌을 표현해달라”는 어려운 주문과 함께. 물론 모형 총이다.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 사진인 총 겨눈 고애신(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배우 김태리가 맡은 주인공)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서재훈 기자 spring@hankookilbo.com

‘페미위키’란 사이트가 있다. 페미니즘과 관련한 사건이나 사람을 모아놓은 네티즌 편집 백과사전이다. 그곳에 ‘래디컬 페미니스트’(급진 여성주의자)로 등재된 학자가 있다. 바로 이나영(50)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다.

그를 보면 전사(戰士)가 연상된다. 연구실은 학교의 울타리를 넘어선다. 페미니즘 문제라면 기자회견이든 세미나든 집회든 달려간다. 뿌리 깊은 차별의 벽, 가해자 옹호의 카르텔에는 창을 들지만, 오늘날의 ‘나혜석’들에게는 든든한 언니다. ‘빻은 소리’, ‘빡침주의’, ‘진보아재들의 전형적인 여성관’…. 그가 페이스북에 적는 날 것의 문장들은, 가해자에게 표출하는 분노인 동시에 피해자에게는 연대의 메시지다. ‘반차별, 반혐오, 반자본, 반식민주의, 반제국주의, 반군사주의, 반인종주의, 반종교근본주의에 찬성하시는 분들, 친추 환영합니다’라는 소개글에는 여성학자 이나영의 정체성이 압축돼있다.

‘나는 뭔가.’

그의 인생을 바꾼 건 이 질문이었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이나영’이란 이름 석 자로 당당했던 삶이었다. 불과 세 살에 부를 수 있는 영어 노래가 100곡에 달해, ‘우리 딸 천재인가’ 부모를 설레게 했다. 중ㆍ고교 시절엔 “내가 쟤(남학생)보다 목소리도 크고, 공부도 더 잘하는데, 왜 나는 부회장을 해야 해요?”라며 구시대의 성별 역할에 반기를 들 정도로 당찼다.

‘자신’으로 꽉 찼던 삶을 결혼이란 사건이 가로질렀다. 이른바 전업주부의 일상엔 자신이 없었다. “내 이름이 불리지가 않더라고요. 내가 누군지 세상은 관심이 없었죠. 그저 나는 ‘501호 아줌마’, 아이를 낳은 뒤엔 ‘○○ 엄마’였죠.”

남편에게 종속된 존재로 보낸 6년, 그는 점점 시들어갔다. 아침에 눈을 떠도 일어나고 싶지 않은 나날이 계속됐다. 몸도, 정신도 병 들었다. 그때 그런 물음이 고개를 든 거다. ‘나란, 여자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아이 둘을 데리고 떠난 유학길은 그 질문에 답을 찾으려는 여정의 시작이었다. 내내 장학금을 받으며 5년여 만에 석ㆍ박사 학위를 따고 미국 조지메이슨대학 교수로 임용됐지만, 그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현장의 학자’가 되기 위해서다.

“미국의 학계는 보통 현장과는 상관이 없어요. 교수들은 책 쓰고 연구하는 학자일 뿐이죠. 나는 운동을 해야 하는데. 연구자는 농부 같은 사람이에요. 척박한 토양에 씨를 뿌리는. 보통 한 학기에 수백 명의 학생을 만나요. 그걸 25년 동안 한다고 생각해보세요. 대한민국을 바꿀 수 있는 일이죠.”

상아탑의 전사, 아스팔트의 여성학자 이나영. 그는 왜 페미니즘 덕에 살았고, 페미니즘이 인생의 전부라고 말하는 걸까.

 ◇연구실 안팎에 ‘성평등세상 기원’, ‘꼰대퇴치’ 
‘페미니스트의 방’. 이나영 교수를 7일 서울 흑석동 중앙대에서 만났다. 그의 연구실 문에는 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표식들이 가득하다. 그 사이에 ‘이나영’이란 이름이 어울려 있다. 서재훈 기자

-연구실 문 밖에 각종 ‘부적’들이 붙어 있던데, 그 중에서도 ‘나는 페미니스트다’라는 게 눈에 띄어요. 선언의 의미인가요?

“여성학을 전공했고 여성학을 가르치는 선생이니, 페미니스트라는 건 굳이 말할 필요가 없죠. 그런데도 그렇게 붙인 이유는 보라는 뜻이에요. 이 복도는 저만 왔다 갔다 하는 곳이 아니고 다른 선생들, 그들을 찾아오는 학생들도 있죠. 그들에게 ‘이 곳에 페미니스트가 있다’고 말하는 거예요. 학생들에게는 ‘(페미니즘 이슈로) 고민하고 있으면 언제든 와라. 나는 너를 지지한다’는 연대의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 부적 20여개의 내용은 이렇다. ‘성평등세상 기원’, ‘꼰대퇴치’, ‘낙태죄 폐지하라’, ‘내가 기쎈여자라구? 넘나 좋군ㅋ’, ‘달라진 우리는 당신의 세계를 부술 것이다’, 손글씨로 적은 책 ‘행복한 페미니즘’(벨 훅스)의 한 구절… 그리고 그 가운데에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다.

-이런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교수에게 학교 재단의 압력은 없나요? (웃음)

“미국에서 조지메이슨대 교수로 임용되고 6개월쯤 됐을 때 중앙대로 왔어요. 이런 사람인지 모르고 뽑았겠죠. 하하. 저는 운동권도 아니었고, (우리나라에서 여성학자를 배출하는 대표적인 학교였던) 이화여대 출신도 아니에요. 미국에서도 사회학이 아니라 여성학을 공부했고요. 하지만 논문 실적이 좋았고 영어 강의도 가능했으니 좋은 평가를 받아서 임용됐지요. 학교에 온 지 얼마 안돼서 성평등상담소장을 했어요. 이어서 (이를 발전시켜) 전국 대학 중 최초로 인권센터를 만들었죠. 소장으로서 굵직한 학내 사건들을 처리하면서 외압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각인시켰어요. 가해자가 대단한 사람이면, 교수들이 들고 일어나기도 하고, 국회의원이 전화를 하기도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학계에도 정계에도 빚진 사람이 없고 나 혼자 커서 온, 그야말로 ‘독고다이’이기 때문에 (인맥의 영향에서) 자유로웠죠. 나중에는 ‘이나영 선생한테 잘 봐달라고 얘기해봤자 오히려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다’고 소문이 났다고 하더라고요. (웃음)”

게다가 그는 언론 노출 빈도가 단연 높은 교수다. 이는 대학 평판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어렸을 때는 어떤 아이였나요? 꿈이 교수나 학자였는지도 궁금해요.

“저는 ‘통신표’(지금의 학교생활기록부) 세대였는데, 작년에 어머니가 통신표를 쫙 모아 둔 걸 보여주신 적이 있어요. 거기에 장래희망을 저와 부모님이 따로 적은 칸이 있더라고요. 보니까, 어머니는 일관되게 ‘교수’라고 적으셨더라고요. 저는 ‘기자’, ‘정치인’, 이런 걸 썼고요.”

-그 시절에 남다른 꿈이었네요.

“남동생이 되레 역차별 당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부모님은 저를 열심히 뒷바라지 하셨어요.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하셨죠. 몸이 약해서 태권도, 자전거 하이킹 같은 운동도 많이 했고, 웅변, 미술, 합창에다 동화구연도 배웠으니까요. 고등학교 시절엔 교련할 때 제가 중대장을 했는데 운동장에서 마이크 없이 사열할 수 있는 유일한 여학생이기 때문이었죠. (웃음)”

-학부 전공은 영문학인데, 여성학 교수가 된 계기는 뭔가요?

“대학 졸업하고 유학을 가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결혼하고 가라고 하셨죠. 그 시절에는 여자 혼자 유학 다녀오면 ‘몸 버린 여자’라느니, ‘시집도 못 간다’느니 그럴 때였으니까요. 결국 선 시장에 저를 내놓고, 5번째 선 본 사람과 한달 반 만에 결혼했어요.”

-한달 반 만에요, 왜요?

“그 사람이 결혼하고 나서도 공부해도 된다고 했기 때문이었죠. 뭐, (남자로서) 싫지 않았던 것도 있었겠지만. 그리고 빨리 선 시장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그래서 스물 세 살에 결혼을 했죠. 그리고는 부산에 내려가서 살았어요. 그게 제 인생의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가는 길목이에요.”

 ◇병들게 한 결혼 생활… 다시 살게 한 여성운동 
스물 셋, 이른 나이에 결혼이란 인생의 새로운 막을 연 이나영 교수. 그런데 진짜 새로운 세계, 페미니스트로서의 삶에 들어가는 관문이 됐다. 그는 왼쪽 가슴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에게 보내는 연대와 지원의 뜻이 담긴 나비 배지를 달고 있었다. 서재훈 기자

-결혼 생활이 어땠는데요?

“전업주부로 6년을 살았죠. 애도 빨리 생겼고요. 그런데 가장 힘든 건, 제가 없다는 거였어요. 그래도 내가 스물 셋 될 때까지 내 이름 걸고 성실하게 살았고, 우리 집도 남동생 이름이 아니라 ‘이나영네 집’으로 불릴 정도로 어머니, 아버지가 저를 자랑스러워하고 사랑했는데… 결혼을 하니까 제 이름이 불리지가 않더라고요. 사람들은 제가 누군지, 이름이 뭔지 관심도 없고 묻지도 않았어요. 그냥 ‘501호 아줌마’, 아이를 낳은 후엔 ‘누구 엄마’로 불렸죠. (주변의) 관심사는 누가 몇 평짜리 아파트에 사는지, 무슨 자동차를 끌고 다니는지, 애는 공부를 잘하는지, 무슨 브랜드의 옷을 입는지 하는 것들이었고요. 너무너무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생활은 게다가 너무나 소비적이었고, 그러니 나는 세상에 도움이 안 되는 삶을 살고 있다고 생각했죠. 대학 다닐 때 과외를 다섯 개씩 하면서 학교, 학원, 도서관을 새벽부터 다니던 나였는데, 그렇게 성실히 산 게 중요하지 않게 된 거죠. 세상과 단절된 삶, 종속된 삶이라고 느꼈어요.”

-종속된 삶이요?

“네, 내 운명은 이제 남편이나 시집의 재력, 혹은 자식의 성적에 따라 결정되고 평가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죠. 내가 어떤 것도 결정할 수 없는 삶이었어요. 그러니 아팠어요. 밤엔 잠을 못 잤고요. 존재의 이유를 알 수 없으니 무기력했고, 죽고 싶었죠. 심지어 부모님도 너무 원망스러웠어요.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죠. ‘(이 사회에서) 여자란 게 그런 존재구나. 그렇다면 왜 대학을 보내나. 밥, 빨래, 바느질이나 하게 하지’ 하는 생각까지 했죠. 제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거예요. 이 질문을 해결할 수 있는 게 뭔지 찾아 다니다 여성운동을 하게 됐고 여성학도 공부한 거죠.”

-여성운동을 했군요.

“부산성폭력상담소에서요. 그때 큰 성희롱 사건들이 몇 개 있었어요. ‘캐디 성희롱’ 사건, ‘호텔 직원 성희롱’ 사건, ‘부산대 월장’ 사건(부산대 여성주의 웹진 ‘월장’을 향한 사이버 성폭력) 같은. 특히 월장 사건을 계기로 ‘온라인 성희롱’이란 개념도 만들고 글도 쓰고 심포지엄도 열었죠. 그제야 여성 노동자가 처한 현실, 노동자의 세상을 알게 됐어요. 그때까지는 노동자로 살아본 경험이 없었으니까요. 가정폭력 사건도 접했죠. 상담소에서 피해자를 구조하는 과정을 보면서 너무 부끄러웠어요. 이런 걸 모르고 살았던 내가 한심하기도 했고요. 그때 (남편과 헤어져) 독립적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페미니스트로서 의식이 생기기 시작한 건가요.

“의식은 만들어지는 거죠. 노력을 통해 성장하고요. 지금도 제가 학생을 통해서 배우듯. 또, 다른 사람의 경험, 책, 만남을 통해서도 성장하죠. 학내 성폭력상담소나 인권센터가 중요한 이유도, 사건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기구로서 역할뿐 아니라 처리 과정에서 당사자도, 지켜보는 사람도 성장하기 때문이에요. 공동체가 성장하는 거죠. 저는 그 과정을 비로소 그때 접하게 된 거예요, 스물 아홉 살에. 그리고 저렇게 멋진 사람들과 함께 있고 싶다, 나도 저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죠. 인생을 사회적 약자에게 헌신하는 사람도 있구나, 자기는 없고. 그러면서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자기가 만들어지는 삶을 처음 본 거예요. 너무 멋있었죠! 유학을 떠난 것도 ‘교수가 되자’, 뭐 이런 게 이유가 아니었어요. ‘나도 저렇게 되고 싶다! 세상 바꾸는 데 기여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생각에서 여성학을 공부한 거죠.”

그래서 서른 둘에 그는 유학을 떠났다. 자녀 둘도 함께였다. 다행히 조기에 퇴직한 아버지와 영어가 가능했던 어머니가 미국행에 동행해 손주들을 뒷바라지했다. 그 덕에 그는 공부에 매진할 수 있었고 5년 반 만에 석ㆍ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을 택했다. 이혼과 재혼이란 결정도 했다.

“한국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죠. 미국에서 이민자는 ‘2등 시민’인 데다, 교수는 현장과 동 떨어져있었죠. 미국에서 어린 시절부터 자란 게 아니니 교수로서 학생과 교감에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요. 한국의 학생들을 만나자는 생각으로 왔죠. 부모님도 제게서 해방 돼야 했고요.”

-결혼이란 경험으로 느낀 건 뭔가요?

“30년 전 한국 사회에서 결혼은 개인의 결합이라기 보다는 가족 간의 결합으로 여겨졌죠. 여성은 그 결합을 통해 거래되는 대상이자, 다음 세대를 재생산하는 도구적 존재로 인식됐고요. 그러니 좋은 여자는 자기 욕망이 없어야 했죠. 이제는 더 이상 그게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죠. 더구나 지금의 20~30대는 많은 자원을 투여 받으면서 자랐어요. 그런데 결혼으로 자기의 욕망, 자기 자신을 내려놓고 남편이나 아이들, 시집 식구들 위해서 헌신하라고 하면 그게 통하겠어요? 그러니 한국에서 가족 구조나 가족을 바라보는 관점, 제도가 급진적으로 달라지지 않는 한 여성들은 결혼을 하지 않을 거예요. 요즘은 ‘비비탄’을 넘어서 ‘비비비탄’ 이라고 하잖아요?

-비비비탄이요?

“비연애ㆍ비혼ㆍ비출산! 연애를 하려 해도 할 (의식 바른) 남자도 없고, 결혼이라는 제도 안에 들어갈 수도 없고, 아이를 낳는 순간 지워지는 짐을 떠안기도 싫으니까. 그러니 젊은 여성들이 ‘(머리에) 총 맞았냐. 그걸 알면서도 결혼을 왜 해’ 하는 거죠. 무슨 ‘아동수당’이니, ‘신혼부부 주거 지원’ 이런 대책을 편다고 자유를 박탈 당할 감옥에 들어가겠어요? 인간 개인이 얼마나 독립적으로 존중 받으며 살 수 있는 사회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죠.”

 ◇페미니즘은 기본 소양, 필수로 교육해야 
이나영 교수가 2013년 미국 서던캘리포니아대학(USC)에서 연구년을 보낼 때 남편에게 선물 받은 그림. ‘왼쪽으로 보기’(Looking left)라는 제목이 붙은 20대 여성작가의 작품이다. 이 교수는 “인종, 성별, 나이가 다른 이들이 모두 왼쪽을 보고 있다”며 “세상을 다르게, 진보적으로 본다는 의미에다 색감도 마음에 들어 아주 좋아하는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서재훈 기자

-유학 시절 여성학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페미니스트로서 자각도 하게 된 건가요?

“페미니스트는 자각의 문제가 아니죠. ‘나는 페미니스트다’ 이렇게 선언을 하는 건, 사실 각자가 바라는 상, 아이디얼 타입(이상형)이 되고 싶다는 의미이죠. 의식과 노력, 실천을 통해서. 완성된 페미니스트란 존재할 수 없어요. 지향을 하는 것이죠. 저 또한 계속 만들어지고 있고, 또 제가 지향하는 페미니스트의 상도 계속 변하고 있죠.”

-지금은 뭔가요?

“저는 ‘포스트식민ㆍ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말해요. 포스트식민을 지향하는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는 거죠.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오히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에 대해서 훨씬 이해가 깊어졌어요. 그래서 한국사회가 아직도 탈(벗어나지)하지 못한 식민사회라는 것, 그리고 이를 이해하려면 페미니즘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걸 알았죠. 그래서 ‘포스트식민 페미니즘’ 이론을 글로 만나게 됐고요. 거슬러 올라가보니 반자본, 반남성중심, 반인종주의에서 출발한 급진 페미니스트가 원조라는 걸 알았죠. 그리고 여기서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도 등장해요. 신자유주의 체제와 가부장제가 연동되는 방식을 고민하는 게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니까요. 포스트식민ㆍ사회주의 페미니스트라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알아듣지 못하니 페북 소개에 쓴 것처럼 ‘반차별, 반자본, 반식민주의, 반인종주의…’ 이런 말로 설명을 하죠.”

-대학에서, 그것도 여대가 아닌 남녀공학에서 여성학을 가르치는 일은 또 다른 의미가 있을 것 같아요.

“우리 사회가 가부장제에, 남성중심 사회잖아요. 거기다가 이성애 중심 사회. 자본도 남성이 대부분 갖고 있고요. 그러니 남성 우위 사회죠. 이런 사회에서 남성들이 변하지 않으면 지구가, 우리나라가 망하겠죠. (웃음) 그런데 몰라서, 무지해서 나쁘게 행동할 수도 있기 때문에 교육자로서 남성들이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도록 키워야죠. 그 자질이란 건, 성차별이나 인종차별을 하지 않는 것 이런 거예요.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소양, 상식과 교양이죠. 그러니 여성학은 모든 남녀공학의 교양 필수가 돼야 해요. 제가 다닌 미국의 학교는 인문ㆍ사회계열은 페미니즘을 필수로 듣도록 했어요. 이ㆍ공계는 그쪽 (페미니즘) 수업이 따로 있었고요. 우리는 그런데 (여대가 아니면) 페미니즘 과목을 필수로 두기는커녕 페미니스트 교수도 거의 없죠. (남녀공학 중에서는) 유일하게 우리 학교 사회학과가 한 학기에 다섯 과목을 개설해요. 우리나라도 모든 학과에서 페미니즘 수업을 듣게 해야 한 30년 지나면 어느 정도 인권 지향 국가가 돼 있을 거예요. 사실 유치원부터 초ㆍ중ㆍ고에 이르기까지 페미니즘 교육을 해야 해요.”

-강의를 할 때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가요?

“학생들에게 질문을 많이 던지려고 해요. 그래야 본인들이 생각할 여유를 갖거든요. 또 최근 이슈 중심으로 수업을 하려고 하죠. 과거와 연결돼있다는 걸 보여줘요. 예를 들어 ‘미디어와 재현’이란 걸 꼭 다루거든요. 지금은 눈 떠서 감을 때까지 스마트폰을 쥐고 있으니까, 완전히 재현물로 세상을 보는 시대잖아요. 서구의 순수미술부터 그 속에서 여성이 어떻게 재현됐는지, 이것이 (현재의) 광고나 드라마와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그 과정에서 여성들이 어떻게 저항했는지, 서구의 페미니스트들이 미러링(차별, 혐오 행위를 반사하듯 뒤집어 보여주는 일)하고 패러디한 순수 예술 작품도 보여주고요. 그러면 페미니스트들은 ‘나 혼자 만의 싸움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갖게 되고, 페미니스트가 아닌 학생들도 ‘이것이 과거부터 축적된 문제구나’ 심각성을 새삼 깨닫게 되죠.”

-연구실에 갇힌 학자가 아닌 ‘현장 학자’라는 생각이 들어요.

“저란 사람은 운동 현장에서 만들어졌어요. 이론으로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요. 이론을 어떻게 실천하느냐에 따라 세상이 변하는 거지. 이론을 공부하게 한 동력은 현실이었죠. 성매매 현장에 관심을 갖고 있으니 이론을 읽는 거예요. 현장에 가야 답답하지 않아요. 집회나 시위에도 꼭 가죠. 저것들도 다 집회, 시위에서 가져온 것들이에요.”

이나영 교수 연구실에선 현장의 냄새가 난다. 책장에 놓인 집회, 시위 용품. 김지은 기자

그는 연구실 책장 곳곳에 놓인 카드들을 가리켰다. ‘나는 여성에 대한 차별과 폭력 없는 국가를 원한다’, ‘여혐 OUT’, ‘성매매 방지 대책 제대로 집행하라’, ‘일본군 위안부 진상규명’ 등의 구호가 적혀있었다.

-페이스북 활동도 열심히 하죠.

“SNS는 2016년부터 본격적으로 하기 시작했어요. 일종의 아카이빙(자료 저장, 보관) 역할을 하는 데다,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빠르고 쉽게 볼 수도 있죠. 젊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해하게 돼서 하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물론 그 덕분에 악명도 높아졌지만. (웃음) 페이스북을 하지 않았다면 제가 중ㆍ고생들의 ‘스쿨미투’를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는 페이스북에 페미니즘 이슈와 관련된 행사나 기자회견 소식과 자료, 기사 같은 정보뿐 아니라 신랄한 비판, 응원과 연대의 글, 분노와 슬픔의 표현도 자주 올린다.

-요즘 젊은 세대가 쓰는 표현도 종종 보여요. ‘빡침주의’, ‘빻은 말(시대에 엄청나게 뒤떨어진 답답한 얘기) 대잔치’ 같은 거요.

“저는 일종의 거간꾼이라서, 이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언어를 쓰는지 기성세대에게 전해줘야 한다고 생각해요. 행정부 고위 공무원 대상으로 강의를 한 적이 있는데 ‘빻은 게 뭔지 아세요’라고 물으니, 1명만 답을 하더라고요. ‘강남역 시위’가 뭔지, 왜 일어났는지도 거의 모르죠.”

 ◇강남역 시위에 가보고 가슴이 뛰었다 
이나영 교수는 ‘강남역 시위’, ‘혜화역 시위’에 나선 영 페미니스트의 외침이, 한국판 ‘세컨드 웨이브’(두번째 물결)라고 말했다. “나혜석이, 고애신이 말했잖아요? 우린 꽃이 아니라 불꽃이라고. 한 줌 재가 될지언정 후손 여성이 기억할 거라고. 늦더라도, 새 물결로 또 돌아올 거예요.” 서재훈 기자

-집회, 시위에도 많이 나간다고요.

“평범한 참여자로 가죠. 특히 ‘강남역 사건’(2016년 5월 서울 강남역 인근 주점 건물의 공용화장실에서 한 남성이 여성을 노려 살해한 사건) 시위가 저한테도 큰 충격이었어요. 누군가 SNS에 ‘강남역 10번 출구, 국화꽃 한 송이와 쪽지 한 장. 이젠 여성 살해에 사회가 답해야 할 차례입니다’라고 올린 글이 엄청나게 퍼졌고, 실제 시위로 이어지는 걸 보면서요. 여성 살해, 페미사이드(femicide)는 1970년대 급진 페미니스트들이 만든 단어거든요. 그런데 일반 여성 시민이 어떻게 그 단어를 정확하게 알고, 다른 시민들을 불러 내는가. 이전에는 여성운동가나 선생들이 주도해서 따라가는 방식이었는데 말이에요. 반성했어요. ‘내가 안다는 게 뭔가, 이론으로 어떻게 세상을 다 얘기하겠나’ 싶었죠. 강남역 시위에 가보니까 분위기가 굉장했죠. 뭐, 가슴이 막 뛰더라고. 자기 자리에서 삶을 고민하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있구나, 일상에서 여성의 불안이 성차별과 연결되고 그게 성폭력과 살해로 갈 수 있다는 걸 너무나 잘 아는 여성 시민이 등장했구나… 이들과 더욱 연대하고, 이들을 더욱 지지하는 좋은 선생이 돼야겠다, 운동을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죠.”

-분노가 중요하다고 느껴져요. 우리가 왜 분노해야 할까요.

“분노가 없으면 세상이 안 변하죠. 세상은 항상 사회적, 상대적 약자의 분노에 의해 변해왔어요. 모든 혁명은 그 분노에 기반한 집합적 행동에서 시작해요. 위정자나 권력자들이 스스로 변하기를 바라면 안 돼요. 그들이 세상을 바꾸는 게 아니죠. 여성 문제도 분노하는 여성들 덕분에 집합적 행동이 일어나고 있고, 바뀌지 않으면 안 된다는 걸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고 실천하고 있죠.”

-올해는 성폭력 ‘미투’(#MeToo)가 잇달았죠.

“강남역 사건이 젊은 세대를 깨웠다면, 미투운동은 세대를 넘어서 저변의 많은 여성들을 일깨웠죠. 특수대학원에서 강의를 하는데, 수업을 받는 어느 (장년층 여성) 분이 그러더라고요. ‘나도 데이트 성폭력을 당해서 결혼했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속담 있잖아요? 그게 성폭력이죠. 여성이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 대표적인 게 성폭력이라는 것, 이것이 사회적ㆍ실존적 타살까지 가게 한다는 것, 그런 걸 깨닫게 된 거예요. 자기의 삶을 이해하는 하나의 창을 열어준 거죠. 법이나 제도의 개선 말고도, 많은 여성들의 의식을 깨우고 그들이 연대하기 시작한 건 일종의 혁명이죠. 혁명이 무슨 정부를 뒤엎어야만 혁명인가요. 의식 혁명이 얼마나 대단한 건데요.”

-용기 내서 미투를 하고도 많은 이들이 재판 과정에서 지치기도 하고, 사회의 시선에 좌절하기도 하지요.

“학생들이 그런 문제로 상담을 해오기도 해요. 그러면 제가 그런 말을 해줘요. ‘이 싸움이 만만치 않을 것이고, 또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도 우리는 성장할 것이다. 죽지 않을 만큼 상처를 입는 게 꼭 나쁜 건 아니다. 맷집이 생길 거다. 더 강해질 수 있다. 그리고 너는 혼자가 아니다. 그게 더 중요하다. 꼭 법적으로 이겨야 승리는 아니다’라고요.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해서 세상은 조금씩 변할 거예요.”

 ◇‘남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나영 교수는 ‘그런다고 변하겠냐’는 자조 혹은 조롱에 이렇게 응수한다.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조금씩 느리더라도 세상은 변할 거라고. ‘거룩한 분노’가 세상을 바꿔왔다고. 서재훈 기자

-일각에서는 요즘의 흐름을 ‘여혐(여성혐오) 대 남혐(남성혐오)의 대결’로 몰기도 해요. 성폭력 사건이나 불법 촬영물이 문제라고 하면서도 ‘혜화역 시위’에서 나온 일부 과격한 구호나 ‘워마드’(여성우월주의 사이트)를 들어서 또 다른 혐오라고 주장하는 거죠.

“남혐이란 존재하지 않아요. 자, ‘백인혐오’ 존재하나요? 백인의 인종차별을 비판하는 거지, 백인 자체를 비판하는 게 아니에요. ‘자본가혐오’는 어때요. 재벌의 이중적인 행태를 비판하는 거지, 돈이 있는 걸 혐오하지는 않잖아요. 다 돈 많이 벌고 싶어 하니까. 더 중요한 건, 거꾸로 백인이 흑인을 혐오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죠? 인간으로 안보죠. 그러니 노예제를 만들었고, 흑인을 비하하고 멸시, 조롱하고 폭력이나 착취, 심지어 살인도 정당화하죠. 그래서 흑인이 백인에게 저항한다고 그게 백인혐오는 아니죠. 그 효과가 백인에 대한 차별, 멸시, 비하, 폭력, 살인 같은 구조적 차별로 이어지나요? 그럴 수 없어요. 힘이 없으니. 마찬가지 아니에요? 개인 남성이 여성들의 언어로 충격을 받거나 마음의 상처를 입을 수는 있겠죠. 그런데 그 다음 무슨 일이 일어나나요? 실제로 남성 차별, 폭력, 성폭력, 살인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고 이를 정당화하는 기제가 되나요? 혐오발언은 효과를 봐야 해요. 특정 집단을 열등한 집단으로 만들고 그럼으로써 차별 구도가 확증, 재생산 돼야 혐오라는 거죠. 같은 발언을 해도 집단마다 효과가 그래서 다른 거예요. 그걸 종합적으로 판단해야죠. 영어로 미소지니(misogynyㆍ여성혐오)란 단어는 있어도 ‘남혐’은 없어요.”

-명쾌하네요. 페미니스트 전사 이나영이 지금까지 지켜온 삶의 도는 뭔가요.

“페미니즘이죠, 뭐. (웃음) 페미니즘이 저를 인간으로 만들었고, 지금도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만들고 있죠. 더 괜찮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나를 계속 환기 시키는 굉장히 중요한 원리죠. 저한테는 거의 모든 것이에요. 이것 말고는 사생활도 없어요. 페미니즘과 상관없는 모임에는 가지 않고, 영화를 봐도 페미니즘과 관계 있는 것만 보죠. 책도 마찬가지고요. 그것만 해도 끝이 없어요. (웃음) 페미니스트로서 저를 추동해준 이들, 운동을 함께 한 사람들을 친구나 동지라고 여기죠. 가족들은 그래서 저를 사회에 내놨다고 해요. 특히 아이들에게 가장 미안하죠. 아이들을 낳고 나서 엄마가 페미니스트가 됐고, 공부를 하고, 운동을 하고, 지금도 계속 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국가도 옮겨 다니고… 아이들이 가장 상처를 많이 입었죠. 딸들이었다면 자부심이 있었겠지만, 아들들이라 남성사회에 속해있으니 어디서 엄마가 누구라고 말도 잘 못하고 언행도 조심스러울 테고요. 지금도 힘들겠지만, 언젠가는 이해해주리라 믿어요.”

-지금도 차별과 폭력에 맞서 싸우고 있는 많은 여성들에게 혹시 해주고 싶은 말이 있나요?

“지금은 비록 마치 세상에 혼자 던져진 듯한 생각이 들겠지만, 지금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비슷한 피해를 입고 싸우는 여성들이 있어요. 이만큼이라도 세상이 바뀌어온 건 수많은 (투쟁의) 선배들이 있었기 때문이죠. 우리가 서로 지지하고 연대하면서 이 길을 걸어 나가면 우리 세대가 아니라도, 다음 세대 혹은 그 다음 세대에는 더 나은 세상에서 우리의 후배들, 딸들이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로 부디 버티시기를 바라요. 그 버틴다는 게 죽을 만큼 버텨서 내가 사라지면 안 되는 거니까, 내가 살수 있을 만큼 버텨야죠. 버티는 과정에서 나 자신도 성장해요. 인생의 또 다른 어려움이 닥쳤을 때 내가 견뎌나갈 힘을 만들어줄 거예요. 또 언젠가는 다른 피해자를 돕는 사람이 될 수도 있을 테고요.”

올 한 해를 보내면서 마음에 남은 문구 중에 이런 게 있다. ‘언니가 있다.’ 당신 혼자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 언니는 비빌 언덕일 수도 있고, 나를 잡아주는 위로의 손일 수도 있고, 게으르고 나태해진 나를 등 떠미는 채찍일 수도 있다. 이 교수와 얘기하면서 그 문구가 퍼뜩 떠올랐다. 아마 든든해서 일 거다. 이 ‘쎈’ 언니가 우리 옆에 있어서.

이나영 교수 연구실 문 안쪽에 붙은 학생들의 손 편지. “지금의 나를, 앞으로의 나를 있게 한 벅찬 선생님”, “괜찮다고 여기는 것들에 분노하는 법을 배웠어요”, “덕분에 인생이 달라졌어요”라는 고백이 담겼다. 김지은 기자

김지은 기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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