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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미의 다시 광릉 숲에서] 겨울에 만난 전나무 이야기

입력
2018.12.12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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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곧게 자란 전나무
올곧게 자란 전나무

한파가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매서운 겨울바람은 마음도 몸도 움츠러들게 만듭니다. 숲도 회색빛으로 변한 듯 합니다. 이런 겨울엔 역시 상록수들이 돋보입니다. 온 세상이 얼어붙은 듯한 차가움 속에서 초록을 유지하는 그 의연함은 새삼 놀랍습니다. 그 가운데서 언제나 줄기하나 흐트러트리지 않고 곧게 자라 올라가는 전나무를 보노라면 정신이 번쩍 드는 듯한 느낌입니다. 오늘 제 마음의 겨울나무는 전나무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세상의 전나무 종류들은 크리스마스트리로도 사랑을 받는 나무이네요.

“어떤 나무를 가장 좋아하세요?” 나무와 관련된 책을 쓰고 나서 제가 많이 받는 질문 중에 하나입니다. 사실, 가장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다양하고 아름다운 모습의 나무들 가운데 하나를 고르라니요! 그래도 선택을 강요받으면 몇 개의 떠오르는 나무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처음 직장을 갖고 일할 때 “연구실 창밖에 서 있던 전나무”입니다. 집과 학교라는 울타리에서 나아가, 꿈꾸던 일을 만들어 내고자 할 때 부딪히는 현실은 생각보다 간극이 아주 컸습니다. 힘들고 지쳐 창밖에 눈을 두면 마음에 들어오는 나무가 바로 전나무 세 그루였습니다. 항상 그 자리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어주는 듯한 전나무의 한결같은 초록빛 올곧음은 언제나 위로이고 격려였습니다. 게다가 그 한결같이 강인한 전나무도 봄이면 더없이 보드라운 연둣빛 새순을 내어 보낼 줄 알고 있으며 그렇게 같은 모습이다가도 어느 틈엔가 쑥 자라 성장하고 있음을 발견하고 나서는 말 그대로 제 인생나무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또 한가지 전나무가 특별하게 생각되었던 것은 숲 속, 다른 나무 그늘 아래서 오래 오래 견뎌내다가 때가 되었을 때 크게 자라, 숲 천이의 마지막 단계인 극상림을 구성하는 나무의 하나라는 것을 들었을 때입니다. 점봉산과 같은 깊은 산에 가면 숲 속에 자라고 있는 작은 전나무들을, 다른 나무들 틈에서 유독 아주 굳고 크게 자란 전나무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전까지 같은 상록성 침엽수인 소나무는 햇볕이 있어야지 견디는 양수여서 천이의 초기 수종이고 음수인 참나무와 같은 나무들에 밀려 도태되며 천이가 진행된다고 알고 있었는데 전나무가 사는 방법은 전혀 달랐던 것입니다.

얼마 전 “균근이 서로 다른 나무를 잇다”라는 조홍범 교수님의 글을 읽고 그 비결을 알았습니다. 땅속에서 나무뿌리는 미생물인 균근의 균사를 통해 공급받은 물과 양분으로 광합성을 하고, 그 산물의 일부를 수수료처럼 전달하는 공생관계에 대해서는 이미 알고 있었지만, 거기에 특정한 곰팡이로 이루어진 균근이 다른 종류의 나무들까지 연결한다는 겁니다. 햇볕을 받아 양분을 만든 자작나무가 균근이 만든 네크워크를 통해 그늘진 곳에서 살고 있는 전나무에 당을 공급하며 여기에는 10종류 이상의 균류 공생체가 역할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경쟁과 성장으로 힘겨운 사회이지만 그래도 찾아보면 땅속에서 아무도 모르게 전나무가 버티고 견뎌내어 성장하기까지 도와주었던 자작나무처럼, 그 나무를 이어주는 균근처럼 우리를 지지하고 지원하는 여러 사람들이 존재하여 오늘의 내가 혹은 우리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한 해를 보내며, 다시금 감사와 겸손한 마음을 가득 채워야 하는 이유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숲처럼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에서, 전나무처럼 어렵게 버텨내고 있는 사람들에게 자작나무처럼 내어주고 균근처럼 이어주며 살아가는 것도 의무라고 다짐해봅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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