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IDEA협회 정상권 회장
‘필리핀 한센인의 날’ 행사 마련
딸라 정착지 거주 300여명 초대
함께 식사 후 마닐라 인근 관광
“세상 밖으로 나올 용기 주고파”
“딸라에 정착한 후 52년 만에 첫 외출입니다.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을 준 한국 한센인들에게 감사합니다.” 필리핀 마닐라 외곽지역의 한센인 정착촌인 깔라오칸시 딸라지역에 거주하는 한센인회복자 네스토(61)씨는 지난 3일 특별한 하루를 보냈다. 한국 한센인들의 후원으로 마련한 ‘필리핀 한센인의 날’ 행사에 초대 받은 그는 세계 100대 여행지로 뽑힌 마닐라 근교 따가이따이를 방문했다. 이날은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의미 있는 날이었다. 아홉 살에 한센병을 앓았던 그는 가족에게 버림받고 딸라에 격리돼 홀로 살아간 지 52년 만에 첫 나들이였기 때문이다. 네스토씨는 “사회적 편견과 멸시, 가난 때문에 딸라를 벗어나는 것은 상상도 못하고 살아왔다”고 말했다.
딸라는 필리핀 마닐라 도심에서 북쪽으로 1시간30분 떨어진 한센인 정착지역으로 극빈층이 거주하는 마을이다. 1940년 5월 당시 집권 말기의 마누엘 루이스 케손 대통령은 마닐라의 성나자로병원에 한센환자들이 넘쳐나 더 이상 수용할 수 없게 되자 마닐라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딸라지역에 나병요양소를 설치했다. 전국의 한센환자들은 이곳으로 강제 격리됐고 요양소 인근에 정착한 한센인도 급증했다. 딸라 나병요양소는 현재 산호세국립병원으로 이름을 바꿔 운영 중이며 필리핀에 개원한 8개 한센전문병원 중 가장 큰 규모다. 지금도 매년 수백명의 한센환자가 치료를 받고 있다.
한센병 치료제를 발견하면서 환자 수가 급격히 줄었지만 필리핀은 아직도 발병률이 높은 국가 중 하나다.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등 서태평양지역에서 매년 3,400여명의 한센환자가 발생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 필리핀은 1,700~2,000여명이 발병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이들은 여전히 차별 속에 사회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다. 가족으로부터 외면당하고 고향에서 쫓겨난 이들의 상처는 깊고 크다. 신체적 장애까지 얻은 한센인들은 제대로 배우지 못하고 직업도 없이 무지와 가난 속에서 근근이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며 살아가고 있는 실정이다. 더구나 마을을 떠나 마음 놓고 관광이나 외부 사회활동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이들에게 한국 한센인들이 우정의 손길을 내밀었다. 딸라지역 ‘필리핀 한센인의 날’ 행사를 추진한 한국IDEA협회(회장 정상권)는 현지 한센인들이 스스로 자존감을 회복해 세상 밖으로 한걸음 더 나아갈 수 있는 용기와 기회를 주기 위해 행사를 마련했다. 행사에 초대 받은 딸라지역 한센인 300여명은 따가이따이에 위치한 필리핀CCT재활센터에서 식사를 즐기고 인근 유원지 관광을 하며 그간의 서러움을 위로 받았다. 자원봉사에 참여한 깔라오칸시, CCT, 산호세국립병원 관계자 100여명도 한센인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나눴다. 치료 중에도 행사에 참석한 롤란도(20)군은 “이웃과 사회, 심지어 가족으로부터 버림받은 우리에게 희망을 준 한국 한센인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며 “병이 완치되면 사회에 나가 직업도 갖고 돈도 벌어 봉사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IDEA협회가 소속된 국제IDEA협회는 세계 1,600만명의 한센병력자들에 대한 편견과 차별을 없애고 이들의 존엄성 회복, 자활기반 마련, 사회복귀를 위해 1994년 한국 한센인들의 주도로 설립된 단체다. 미국 뉴욕에 본사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 30여개 국가가 회원국으로 가입돼 있다. 세계 한센인을 위해 교육, 주거환경개선, 선교, 장학, 생필품 및 급식 지원사업과 인식변화를 위한 세미나, 워크숍을 25년째 진행하고 있으며 국제연합(UN)에서도 인정받는 단체로 성장하고 있다. 현재 국제IDEA협회 회장은 한국IDEA협회 정상권 회장이 겸직하고 있다.
정상권 회장은 “전 세계 한센인들은 수세기 동안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잘못된 인습으로 인한 편견 속에서 사회와 이웃과 가족들로부터 격리된 채 힘든 삶을 살아야 했고 한국도 마찬가지였다”며 “지금은 한국의 한센인들이 경제자립을 통해 인간성 회복을 이뤄낸 것처럼 필리핀의 한센인들도 동등한 인격체로서의 권리와 존중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깨우치게 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정 회장은 이어 “한센인과 일반인 사이의 차별과 편견의 장벽을 걷어내는 계기가 되길 희망한다”며 “아직도 세계 여러 국가에서 사람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는 1,600만명 한센인 모두에게 지원의 손길이 미치고 한센인과 일반인이 하나가 되는 날이 올 때까지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마닐라=글ㆍ사진 하태민 기자 ham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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