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례 있는 결혼식보다 많아져
진솔한 이야기에 하객도 감동
“사랑하는 고애신을 위해 남은 생을 다 쓰겠다던 유진초이의 대사처럼,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귀하를 애정하는데, 내 남은 생을 다 쓰겠소. 이제 우리 끝까지 같은 길로 걸읍시다. 러브하오. 2018년 10월 20일. 귀하의 영원한 고애신이 되고픈, 박가영 드림.”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이 인기리에 종영된 이후 결혼식을 올린 이황재(31), 박가영(31)씨 부부는 결혼식에서 미스터 션샤인의 대사 톤을 적용한 혼인서약서를 준비해 낭독했다. 보통 주례 없이 결혼할 때 부부가 준비한 혼인서약서를 읽는 경우가 많은데 이 부부는 주례를 맡은 목사로부터 서약문을 써오라는 과제를 받았다. 사실은 서약서 과제를 주는 것을 알고 주례를 부탁했다고 한다. 서로를 왜 선택했는지, 앞으로 만들고 싶은 가정은 무엇인지를 고민해서 내용에 담아야 했다. 박씨는 “과제를 받은 건 8월 말이었는데 당시 ‘미스터 션샤인’에 푹 빠져 있었다”며 “드라마에서 사용한 ‘귀하’라는 호칭과 ‘러브하오’라는 말을 당시 예비신랑과 유행어처럼 썼기 때문에 결혼서약서에도 드라마 내용과 대사를 차용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다행히도 하객들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 많은 이들이 박씨의 결혼식을 미스터 션샤인 서약문으로 기억하면서 강한 인상이 남았다고 평했다. 특히 ‘러브하오’ ‘유진초이’ 등의 단어가 나올 땐 결혼식장 여기저기서 웃음이 터져 나왔다. 물론 해당 드라마를 보지 않은 사람들은 맥락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고, “낯 간지럽다”, ‘오글거린다”는 반응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박씨는 사람들 앞에서 앞으로 함께 하는 삶을 다짐하는 자리를 딱딱한 분위기가 아니라 재미나게 하고 싶었다며, 소기의 성과는 거뒀다고 자평한다. 박씨는 “’그 결혼식장 밥이 맛있었다, 별로였다’로 기억되질 않길 바랐다”며 “결혼식 전체 식순 중에서 서약서 낭독이 가장 집중이 잘 된 시간이었다, 기억에 남는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혼자 코끝이 찡했다”고 했다.
주례 대신 부부가 개성과 재치를 담아 직접 쓴 혼인서약서를 낭독하는 결혼식이 늘고 있다. 앞서 이황재ㆍ박가영씨 부부처럼 주례가 있어도 서약서를 낭독하기도 한다. 지루한 결혼식에서 탈피하면서도 자신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아내려는 이들이 많이 때문이다. 웨딩서비스 전문업체 아이웨딩에 따르면 부부 10쌍 중 7쌍 정도가 주례 대신 혼인서약서를 낭독하고 있다. 이종현 아이웨딩 미디어콘텐츠팀 차장은 “3, 4년 전부터 주례 없는 결혼식이 늘기 시작했다”며 “지난해부터는 주례가 있는 결혼식보다 혼인서약서만 낭독하는 경우가 더 많아졌고, 최근에는 양가 어른의 덕담을 듣는 시간을 구성하는 이들도 생기고 있다”고 말했다.
◇소소한 이야기 담으면서 부부와 하객들에게도 재미
야외 결혼식에는 달갑지 않은 궂은 날씨를 오히려 혼인 서약서에 담은 경우도 있다. 태풍 ‘콩레이’가 상륙한 지난 10월 6일. 부산 진구에 사는 김봉경(32)ㆍ손윤서(32)씨 부부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씨에 야외결혼식을 치렀다. 하객들에게는 다소 미안했지만 결혼식을 미룰 수도 없었다. 손씨는 주례 없이 결혼하는 대신 준비한 혼인 서약서에 콩레이 얘기를 담았다. “태풍 ‘콩레이’가 한반도에 상륙했습니다. 일본어로 뜻은 ‘혼례’(こんれい)’라고 합니다. 이렇게 비바람이 몰아치는 날 진행하는 결혼식인 만큼 어떠한 풍파 속에서도 함께 손을 잡고 지혜롭게 가정을 지키겠습니다.” 손 씨는 “결혼식 날 태풍이 몰려와 영화 ‘어바웃타임’의 한 장면 같았다”며 “서약서에도 태풍 얘기를 담아 서약서를 볼 때마다 추억이 떠오른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20일 결혼식을 올린 최준선(28)씨도 서로를 아끼고 배려하자는 내용을 재치 있게 담은 혼인 서약서를 작성했다. 신랑의 서약서에는 “당신보단 내가 조~금 더 소질 있는 청소하기, 빨래 널고 개기를 묵묵하고 야무지게 해내는 똑 부러진 남편이 되겠다”는 내용이, 신부의 서약서에는 “쌍꺼풀이 없는 여자가 이상형인 당신을 위해 평생 매력적인 ‘무 쌍꺼풀’을 유지해 영원한 당신의 이상형으로 남겠다”는 내용이 담겨 결혼식장은 웃음 바다가 됐다. 최씨는 “우리 부부를 잘 알지도 못하거나 어설프게 아는 사람이 형식 때문에 주례로 서는 건 지루하고 의미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며 “혼인서약서에는 거창하고 두루뭉술한 이야기보다는, 진짜 마음에서 우러나는 약속을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업무의 특성이 담긴 혼인 서약서도 있다. 같은 패션회사에 다니다 지난 9월 15일 결혼한 김모(29)씨 부부의 혼인 서약서에는 패션 관련 내용이 듬뿍 담겨 있다. 신랑은 서약서에 “옷과 신발을 적당히 사고, 항상 사기 전에는 아내에게 허락을 받겠습니다. 아내의 아름다운 모습을 담아내는 카메라 기술을 연마하여, 인스타 스타로 만들겠습니다.”라고 적었다. 신부는 대신 “슈프림(의류 브랜드) 리스트를 함께 검토해주겠습니다. 남편이 술을 마시고 새벽에 들어오는 날에도 대문의 비밀번호를 바꾸지 않겠습니다”라는 내용을 담아 하객들로부터 유쾌한 결혼식이라는 평을 들었다.
◇성차별적 표현 여전한 혼인서약서 수정하기도
“오늘부로 사랑하는 준석씨를 남편으로 맞이합니다. 당신은 싱글 라이프를 찬양하던 내게, 사랑을 위해 용기 내고 노력해도 된다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용기와 노력이 결실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오래도록 당신을 사랑하고 아껴주며 행복하게 해줄 것을 서약합니다.”
세종 소담동에 사는 최정희(28)ㆍ오준석(29)씨 부부가 직접 작성한 서약서는 재치 대신 진심을 담았다. 이들 부부도 애초에는 인터넷에서 ‘재치 있는 혼인 서약서’를 검색해서 서약서 작성에 참고하려 했지만 성차별적인 표현이 많다는 것을 발견하고 마음을 바꾼 것. 신랑의 경우에는 ‘돈을 잘 벌어 오겠다’ ‘지켜주겠다’라는 표현이, 신부의 경우에는 ‘싸워도 아침밥을 꼭 챙겨주겠다’는 문구들이 많았다. 최씨는 “아직도 성차별적 표현들이 많아 놀랐다”며 “다소 재미가 없더라도 진심을 담아 짧게 작성하는 게 낫겠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21일 결혼한 장승복(31)ㆍ장혜진(31)씨 부부도 서약서를 작성하기 전 인터넷에서 돌아다니는 서약서를 검색했다가 다소 성차별적 내용이 담긴 조항을 보고 변경했다. ‘남편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 50대까지 몸매관리를 하겠다’는 내용 대신 “싸우더라도 야, 너, 장승복! 짜증난다! 등의 발언은 삼가겠다”는 내용이, 남편의 서약서에는 ‘잔소리 해도 잘 받아주겠다’는 내용 대신 “스타벅스에서 쓰는 돈은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담겼다.
장씨 부부는 지금도 혼인 서약서를 직접 고민해서 쓰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1년이 지난 지금 ’야식을 시켜먹지 않는다’와 같은 모든 서약서 조항을 다 지키지는 못합니다. 하지만 부부 관계에 관한 항목들은 열심히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적어도 혼인서약서에서 맹세한 대로 ‘짜증난다!’는 표현은 사용하지 않습니다. 혼인서약서를 볼 때마다 지켜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고은경 기자 scoopkoh@hankookilbo.com
김현종 기자 choikk999@hankookilbo.com
진달래 기자 az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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