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종헌 공모 범죄사실 최소 30여개
‘물의 판사 불이익’ 직접 체크하고 결재
김앤장 독대 후 임종헌에 “전원합의체 회부할 것”
‘행정권 남용 문건’ 대법원장에 보고 정황
대법관 영장 기각에도 소환조사 못 피할 듯
사법농단 의혹을 받고 있는 박병대 고영한 전 대법관의 구속영장은 기각됐지만, 검찰 수사는 여전히 양승태 전 대법원장을 최정점에 두고 진행될 전망이다. 양 전 대법원장이 구체적 사안에 대해 직접 진두지휘한 정황이 검찰 수사로 속속 드러나고 있어서다.
7일 임종헌 법원행정처 차장의 공소장과 박 전 대법관, 고 전 대법관의 영장청구서 내용을 종합하면, 양 전 대법원장의 범죄사실은 적어도 30여 개에 달한다. 사법농단 의혹에서 ‘행동대장’ 역할을 한 임 전 차장의 혐의 가운데 △산케이신문 전 서울지국장 사건 재판 개입 △박근혜 전 대통령 측근 박채윤씨 소송 지원 △홍일표 의원 사해행위취소 소송 검토 등 청와대와 국회의원 민원해결 관련 혐의 몇 개를 제외하면 대부분이 양 전 대법원장이 공모관계로 묶여있다.
우선 양 전 대법원장은 사법농단의 가장 큰 줄기인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 소송을 앞장서 진두지휘한 것으로 파악됐다. 박정희 정부 당시 체결한 한일청구권 협정의 정당성을 옹호하고자 했던 박근혜 정부 청와대와, 상고법원 도입 등 현안을 안고 있던 양승태 사법부의 ‘재판 거래’는 김기춘 당시 대통령 비서실장 공관회의에서 큰 틀이 정해졌다. 두 차례에 걸쳐 진행된 회동에는 차한성(2013년 12월)ㆍ박병대(2014년 10월) 당시 법원행정처장이 참석했다. 사법부와 청와대, 행정부의 회동은 대법원장의 지시나 승인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양 전 대법관은 2015년 5월부터 2016년 10월 사이 미쓰비시 등 일제 전범기업의 소송대리인인 김앤장 법률사무소 소속 한모 변호사와 세 차례 독대하고, 사건 진행 과정을 논의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법원 계류 사건의 피고인 측과 사법부의 수장이 만난 것이다. 검찰은 그들이 소송을 전원합의체에 넘기는 방안을 논의한 것으로 파악했다. 실제 이 무렵 양 전 대법원장은 임 전 차장을 대법원장실로 불러 “대법원장 임기 내에 결론을 내리기는 쉽지 않겠지만 강제징용 사건을 전원합의체에 회부하겠다”는 취지로 말했고, 이 의중은 외교부 차관 등에게도 전달됐다.
최근 드러나고 있는 ‘법관 블랙리스트’ 사건에서도 양 전 대법원장은 최종 결정권자로서의 역할을 했다. 검찰이 압수수색을 통해 확보한 ‘물의 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에는 박 전 대법관과 함께 양 전 대법원장의 결재 서명이 들어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해당 판사에게 어떤 불이익을 줄지 직접 V자로 표시하기도 했다. 이 문건에는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1심 판결을 두고 ‘지록위마(指鹿爲馬ㆍ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한다는 고사성어로 진실을 가리는 거짓이라는 뜻)’라며 비판 글을 법원 내부망에 올렸던 김동진 부장판사에 대해 ‘조울증’ 허위 진단이 적혀 있기도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나서 일선 법원의 결정을 뒤집은 정황도 있다. 양 전 대법원장은 2015년 4월 9일 서울남부지법이 사립학교 교직원연금법의 재직기간 산입 여부를 놓고 헌재에 ‘한정위헌’ 여부를 묻는 위헌법률심판제청 결정을 내리자 이튿날 실장회의에서 대책을 논의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남부지법의 결정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이규진 전 양형위 상임위원을 통해 재판장에게 의중을 전달한 것으로 전해졌다. 재판부는 결정 내용을 당사자에게 알린 상황이었음에도 결국 결정을 직권 취소했고, 이 과정에서 법원행정처 전산정보국이 동원돼 내부 전산망에서 결정문이 열람되지 않도록 은폐조치까지 취해졌다.
박근혜 정권의 정당성을 흔들 수 있었던 원세훈 전 국정원장 사건에 대한 법원행정처 차원의 관리도 양 전 대법원장 주도로 이뤄졌다는 게 검찰의 판단이다. 이밖에 검찰은 문건 작성 자체로 반헌법적 범죄에 해당하는 여러 법원행정처 문건들을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보고받았다는 진술을 작성자 등 당시 심의관들에게 확보한 상황이다.
검찰은 당분간 박 전 대법관, 고 전 대법관에 대한 조사에 집중하면서 영장 재청구를 준비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양 전 대법원장이 직접 관여한 사건이 많은 만큼, 두 전직 대법관의 구속 여부와는 무관하게 양 전 대법원장에 대한 조사가 불가피하다는 게 수사팀 내부의 기류다. 다만 12월 중순으로 예정됐던 양 전 대법원장 소환은 다소 늦어질 것으로 보인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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