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상반기 점유율 20% 넘어
‘보헤미안…’ 열풍에 더 오를 듯
1988년쯤 서울에서 경주로 가는 수학여행 열차. 객실엔 ‘007가방’만 한 카세트 테이프 플레이어가 걸려 있었다. ‘해외 팝송 짬뽕 테이프’에선 미국 가수 조지 벤슨이 부른 ‘낫싱 고너 체인지 마이 러브 포 유’가 흘러나왔다. “아이 돈 워너 리브 위드아웃 유~.” 여고생들은 후렴구를 기다렸다는 듯 ‘떼창’을 하고 손을 머리 위로 흔들었다. 더 따라 부르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은데 영어 실력이 받쳐 주지 않아 허밍으로 흥을 이어가는 모습이 정겹다. 2년 전 종방한 tvN 드라마 ‘응답하라 1988’에 나온 모습이다. 영어 공부와 담을 쌓았던 덕선(혜리)이도 따라 불렀을 만큼 30년 전 해외 팝송은 청춘의 ‘반쪽’이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해외 팝송은 흔적을 감추기 시작했다. 음악의 주 소비층인 10~20대가 아이돌 K팝에 눈을 돌리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TV뿐 아니라 라디오에서도 해외 팝송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은 잇따라 폐지됐고, 세계 4대 음반사 중 하나였던 EMI뮤직도 2008년 한국에서 철수했다.
◇ 10년 만에 음원 시장 점유율 20% 첫 돌파
고사 직전에 놓인 줄 알았던 국내 해외 팝 음악 시장에 변화가 일고 있다. 2009년 가요 대비 6.2%에 불과했던 해외 팝 음악의 음원 시장 점유율은 2017년에 19.6%로 3배 이상 뛰었다. 멜론 지니 등 국내 6개 주요 음원 사이트의 음원 소비량을 집계하는 가온차트가 최근 10년간 해외 팝음악 소비율 변화를 조사한 결과다.
올해 1월부터 6월까지 상반기 해외 팝송의 점유율은 20%를 넘어섰다. 10년간 최고 수치다. 김진우 가온차트 수석 연구위원은 “올 하반기에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 열풍으로 퀸의 음원 소비가 폭증한 것을 고려하면 올해 해외 팝송의 시장 점유율은 20%대를 훌쩍 뛰어넘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국내에서 ‘찬밥’ 취급받던 해외 팝 음악 시장의 이례적 성장이다. 10월 31일 영화 개봉 후 지난달 18일까지 약 3주 동안 ‘보헤미안 랩소디’와 ‘섬바디 투 러브’ 등 퀸 음원 누적 사용량(스트리밍, 다운로드 등)은 1,200만건을 넘어섰다.
◇ 오디션 프로그램ㆍ큐레이션 효과
마이클 잭슨(1958~2009) 같은 세기의 팝스타가 등장해 세계의 음악 시장에 불을 댕긴 것도 아니다. 해외 팝 음악은 침체의 수렁으로 추락하다 어떻게 다시 반전의 기회를 잡았을까. 국내 음악 소비 방식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진단이다.
아이돌 육성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는 해외 팝 음악 시장 성장의 ‘일등 공신’이다. SBS ‘K팝 스타’와 Mnet ‘프로듀스 101’ 시리즈 등에서 ‘셰이프 오브 유’ ‘헬로’가 경연곡으로 쓰이면서 ‘K팝 세대’인 10~20대는 해외 팝 음악을 찾아 듣기 시작했다. 김상화 음악평론가는 “샘 스미스, 아델, 에드 시런 등의 노래가 국내에서 대중적인 폭발력을 얻은 계기도 아이돌 육성 오디션 프로그램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큐레이션 음악 서비스의 보편화도 해외 팝 음악 시장의 성장에 밑거름이 됐다. 이진영 포츈 뮤직 대표는 “요즘 음악 청취자들은 ‘일할 때 듣기 좋은 음악’ 등의 주제로 음원 사이트 내 블로그에 큐레이션 된 추천곡 서비스를 즐겨 이용한다”며 “이 리스트에 해외 팝송이 적지 않고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사용도 늘고 있는 것”이라고 봤다. KT그룹의 디지털 미디어랩인 나스미디어에 따르면 올해 인공지능(AI) 스피커 보급량은 국내 전체 가구의 15%인 300만대로 추정된다. AI 스피커에 ‘비 오는 날 듣기 좋은 노래 틀어줘’ 등식으로 음악 재생 서비스를 이용하면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해외 팝송이 섞여 나와 소비량이 는다는 설명이다.
음악 영화의 공도 무시할 수 없다. 임향민 유니버셜뮤직코리아 이사는 “‘비긴 어게인’과 ‘맘마미아’, ‘라라랜드’ 등 음악 영화의 인기”를 해외 팝 음악 성장의 요인 중 하나로 꼽았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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