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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석무 칼럼] 상대방을 기분 좋게 해주는 호칭

입력
2018.12.07 04:40
수정
2018.12.07 10:3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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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말처럼 무궁무진한 조화를 부리는 것은 세상에 없다. 가장 흔한 말로 ‘말 한마디로 천 냥 빚도 갚는다’라는 말이 있듯이 남에게 기분 좋고 편한 마음을 주는 고운 말 한마디는 그렇게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모든 말 중에서도 남을 호칭할 때의 고운 말처럼 기분 좋게 해주는 말도 많지 않다. 정확하게 사용하는 말이 아님은 분명하지만 요즘 큰 백화점이나 큰 병원에서 종사하는 사람들이 고객이나 환자들에게 연령을 살펴 여자는 ‘어머님’, 남자는 ‘아버님’으로 호칭하는 것을 들으면 예전과는 다른 느낌을 받는 것이 사실이다.

예전에는 보통 ‘손님’이니, ‘고객’이니 라고 말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근래에는 어느 사이에 말이 바뀌어 다정한 느낌을 주는 말씨로 변했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상대방에 대한 고운 말로 부르는 호칭은 기분이 좋고 편한 느낌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렇게 고운 말씨나 격에 맞는 언사(言辭)는 상대방에게 좋은 느낌을 주기에 넉넉하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처럼 교양이 풍부한 선비들의 말씨는 역시 듣는 사람의 마음을 편하고 기분 좋게 해주는 경우가 많았다. 함께 어울리는 동년배들 사이에서도 조금이라도 자신보다 어린 사람에게는 ‘노형(老兄)’이라고 불러 아랫사람이지만 형처럼 대접한다는 의사를 밝혀주면서 상대의 마음을 편하게 해주었다. 또 나이가 조금이라도 위인 분에게는 그냥 ‘형씨(兄氏)’라 호칭해주고, 더 다정하게는 ‘존형(尊兄)’이라 호칭해주면 더 가까운 관계처럼 느끼게 된다. 이렇게 상대방을 어떤 호칭으로 부르느냐가 그만큼 인간관계에서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성씨도 같고 본관도 같은 경우 우리는 흔히 ‘일가간(一家間)’이라고 말하며 나이와 항렬에 따라 여러 호칭이 나오기 마련이다. 당내(堂內)인 경우야 각각의 호칭이 있어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당내를 벗어나고 월촌(越寸)한 경우는 딱 맞게 부르는 호칭이 쉽지 않은 경우가 많다. 나이는 어린데 항렬은 숙항이나 조부ㆍ증조부의 항렬인 경우 아무리 나이가 낮아도 아저씨, 대부(大父)로 부르면 고운 말로 여긴다. 그러나 나이는 많은데 항렬이 낮은 경우 문제 될 때가 많다. 이런 경우 가장 많이 부르는 호칭은 ‘족장(族丈)’이라는 말이면 모두가 부담 없이 받아들이는 호칭이 된다.

친구들끼리 어울려 지내는 경우 조카와 삼촌이 동년배여서 여러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경우가 있는데, 이런 때에 남의 삼촌에 대한 호칭과 조카에 대한 호칭은 유식한 사람들이 주로 쓰던 고운 말이 있다. 보통 남의 숙부나 삼촌은 ‘완장(阮丈)’이라 부르고 남의 조카는 ‘함씨(咸氏)’라고 부르는데 이에는 어려운 옛날의 고사(故事)가 있다. 옛날 중국의 진(晉)나라 때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는 일곱 선비이자 문사들이 어울려 지냈는데, 이중에 완적(阮籍)과 완함(阮咸)이라는 숙질(叔侄)이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 씨의 어른이라 하여 완적에게는 ‘완장’이라 부르고 조카에게는 ‘함씨(咸氏)’라고 부르는 이유가 그래서였다. 옛날 교양 있는 어른들은 남의 삼촌은 완장씨, 남의 조카는 함씨라고 호칭하여 고아한 말씨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한문의 재미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시에서 글에서 자주 인용하는 경우 똑같은 말을 중복해서 사용하는 것은 재미가 줄어들기 때문에 같은 관직의 이름도 몇 개의 호칭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평안감사는 약칭하거나 반복 사용을 피하기 위해 ‘기백(箕伯)’이라고 불러 옛날 기자(箕子)조선이 있던 평양을 지칭해서 만들어진 용어임을 알게 된다. 그런 의미로 함경감사는 ‘북백(北伯)’, 황해감사는 ‘해백(海伯:海州가 도읍지였음)’, 강원감사는 ‘동백(東伯)’, 경기감사는 ‘기백(畿伯)’, 충청감사는 ‘금백(錦伯:금강이 있는 지역)’, 경상감사는 ‘영백(嶺伯:영남의 지역)’, 전라감사는 ‘완백(完伯:完山, 完州 등의 이름에서 유래)’이라고 불러 약칭으로도 지역의 역사성까지를 의미해주는 멋진 호칭을 사용할 줄 알았던 사람들이 조선의 교양인이었다.

‘조선왕조실록’이나 조선의 역사책에는 대체로 그런 약칭이나 고아한 호칭을 사용하되 ‘전라도감사’라고 쓰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큰 지역의 호칭도 예전에는 지금과는 다르게 사용하는 경우가 많았다. 지금 우리가 흔히 남한(南韓)ㆍ북한(北韓)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남선(南鮮)·북선(北鮮)이라 하여 조선의 ‘선(鮮)’자를 살리려는 의도가 있었다.

동년배나 친구들 사이의 호칭도 그냥 이름을 불러대는 것보다는 아호로 부르는 것이 훨씬 아름답고, 인형(仁兄), 대형(大兄), 학형(學兄) 등의 호칭을 붙여서 부르면 매우 품위 있는 호칭으로 된다. 노경의 친구들끼리 어린 시절에 불렀던 이름으로 아무개, 아무개라고 부르는 일은 역시 품위 있는 호칭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대가족 제도에서 핵가족 시대로 바뀌면서 당내 친척에 대한 호칭도 품위 있는 호칭은 사라져가는 이런 때, 남에 대한 호칭이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옛날이나 지금이나 상대방을 배려해 주어 손해 보는 경우는 많지 않다. 남에 대한 호칭, 그래서 중요하다. 야하고 상스러운 용어에서 고아하고 품위 있는 용어로 바꾸는 일도 교양인들이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된다.

박석무 다산연구소 이사장ㆍ우석대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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