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4> 장시성 휘주문화 우위엔 ③왕커우와 장완
우위엔에서 휘주부로 가는 길에 왕커우(汪口)가 있다. 넓은 웅덩이라는 뜻이다. 마을 앞으로 융촨허(永川河) 수로가 이어진다. 1110년 송나라 때 처음 마을이 형성됐다. 주위가 높고 움푹 들어간 지형이라 산에서 내려온 물이 고였다가 강으로 퍼져나가는 형세다. 중국 성씨 중 1ㆍ2등을 다투는 왕씨, 그러나 왕커우는 유(俞)씨 집성촌이다.
빗줄기가 조금 세졌다. 강변을 따라 마을로 이어진 길은 천년고가(千年古街)라 불린다. 세 명 정도 나란히 걷기도 힘든 골목이다. 홍수가 지나면 골목에 얇게 은빛 모래가 쌓여 백사만항(白沙灣巷)이라고도 한다. 얼마나 멋진 현상이 펼쳐지는지 보고 싶었지만 비는 여행과 절친하지 않다. 동네 사람들도 옹기종기 모여 실내에서 마작을 즐긴다. 거실 벽에 걸린 복록수(福禄壽) 신선은 중국인이 엄청 좋아한다. 돈, 명예, 목숨이 가장 중요하니 말이다.
용미연(龍尾硯) 깃발이 곳곳에 휘날린다. 문방사우인 붓, 먹, 종이, 벼루 모두 휘주에서 생산된 품질을 최고로 알아준다. 휘주를 말하는 지명과 연결해 대명사처럼 선필(宣笔), 휘묵(徽墨), 선지(宣紙), 흡연(歙硯)이라 부른다. 흡주(歙州)는 송나라 이후 휘주라 불렸으니 흡연은 휘주 벼루를 말한다. 우위엔의 용미산에서 나오는 돌로 제작된다. 장사로 부를 쌓고 선비 문화를 형성하기에 딱 좋은 천혜의 땅, 휘주의 자랑이다.
왕커우는 강을 이용한 운송으로 부를 쌓았다. 향약소 안에는 선박조직인 선회(船會)가 있다. 삿대인 탱고(撑篙)를 건 거룻배, 박자선(駁子船)이 놓여 있다. 동네마다 운송하는 배 형태가 달랐는데 왕커우의 배가 가장 빠르고 안정적이었다고 한다. 그만큼 운송사업도 번창했다는 이야기다. 향촌 자치규약이자 조직인 향약이 명나라 시대 활발하게 보급됐다. 명 태조의 성유육언(聖喻六言)이 지금도 걸려 있다. 행복한 가정과 평화로운 동네를 가꾸며 살았을 듯하다.
길이 끝나는 곳에 가림벽이 나온다. ‘복’자를 보고 뒤돌아서면 유씨종사(俞氏宗祠)다. 원래 명나라 때 건축됐으나 명청 교체기 전쟁 중에 훼손됐다. 청나라 정삼품 벼슬 조의대부를 역임한 유응륜이 중건한 사당으로 보존 상태가 아주 양호하다. 5칸 너비의 겹처마 형식인 문루는 멀리서 볼수록 웅장하다. 담장과 한몸처럼 붙었고 지붕 양옆으로 마두장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인본당(仁本堂)이다. 비가 많이 내리면 마당은 연못으로 변한다. 풍수 관념에서 물을 재물이라 생각한 사람들은 하늘에서 내린 비를 담는 마당을 천정(天井)이라 부르고 사수귀당(四水歸堂)을 기원한다. 사방의 물이 집에 남기를 바란다. 그렇지만 인색하지는 않았다. 동서남북에 만든 네 구멍으로 빠져나가게 했다. 조상의 은덕을 입어 부와 명예를 쌓고 선행을 베푸는 마음도 함께 배치한다.
편액 주위는 물론 기둥과 두공, 들보마다 목조가 화려하다. 정주일맥(程朱一脉)은 북송의 정호와 정이 형제에서 시작해 남송의 주희가 집대성한 정주이학을 경탄하고 있다. 부자주사(父子柱史)는 태사공을 연이은 사마염과 사마천 부자에 대한 찬양이다. 향현(鄕賢)은 품성과 학식이 뛰어난 인재에 대한 기원이다.
장쩌민 전 주석이 다녀간 장완
왕커우를 나와 8km 떨어진 장완(江灣)으로 향한다. 2001년 장쩌민 전 중국 공산당 주석이 다녀간 후 마을이 꽤나 단정해졌다. 지도부터 깔끔하고 친절하다. 후진타오 전 주석의 고향도 휘주다. 휘주문화는 두 명의 ‘황제’를 배출했다고 자랑한다. 대문짝만한 장쩌민 사진과 만난다. 옆에는 사당이 있다. 대체로 사당은 마을 안쪽에 위치하는데, 아마도 도로를 내기 쉽고 공간이 넓은 곳을 입구로 하다 보니 생긴 상황으로 보인다.
소강종사(蕭江宗祠)는 명나라 신종 때인 1578년에 처음 건축했다. 청나라 말기 태평천국 민란 때 훼손됐다가 1924년 중건했다. 문화혁명 때도 파괴됐다가 장쩌민이 ‘왕림’한 후 2003년 지금의 모습으로 살아났다. 강남 일대 70개의 종사 중 ‘강남제일사(江南第一祠)’로 불린다. 한나라 재상 소하의 후손인 강남절도사 소정은 당나라 말기 전란을 피해 장강을 넘어 남하했다. 강을 넘는 일이 꽤나 감동이었을까, 성을 강씨로 바꾸고 소강씨 1세조가 된다. 원래 지명은 윈완(雲灣)이었는데 강씨가 번성하면서 장완으로 변경됐다. 그래서 강씨종사가 아니라 소강종사다.
영원히 근본을 생각하라는 뜻을 담은 영사당(永思堂) 앞에 제사상이 차려져 있다. 오곡과 술, 두부와 선지도 차리고 생선, 과자, 채소, 과일까지 공물이다. 흥미로운 양생(兩牲)도 있다. 고대부터 큰 제사 차림은 삼생(三牲)을 원칙으로 했다. 근면을 대표하는 소, 풍족을 상징하는 돼지, 화목을 나타내는 양까지 모두 올린다. 여기 씨족 종사 제사에서는 하나를 줄여 양생을 바친다. 영사당 뒤편은 위패가 안치된 침당(寢堂)이다. 소강씨 조상들이 후세의 번영 덕분에 영면하고 있다.
사당을 나와 장완 패방을 지나 마을로 들어선다. 골목마다 우물이 많다. 정말 맑은 물이 솟아 투명하다. 왜인지 알수 없지만 원형도 있고 육각형도 있다. 두레박이 수없이 오르내린 흔적과 사람의 온기까지 담은 연륜이 묻어난다. 수다도 떨고 밀담도 나눴지 싶다. 어느 집 마당의 항아리에는 물이 가득하다. 너무나 맑아 반영으로 비친 대문이 고스란히 항아리로 들어온다. 심지어 180도 회전시켜도 실물인지 반영인지 헷갈린다. 금붕어 한 마리가 헤엄치는 항아리도 있다.
한참 골목을 돌아 장치창(江啓昌) 선생 댁을 찾았다. 2001년 5월 30일 장쩌민이 방문한 집 주인인 그는 당시 40년을 근무하고 은퇴한 교사였다. 거실에 기념사진이 걸려 있다. 장 선생은 16년이 더 지났지만 여전히 건강하고 인자한 인상이다. 작별 인사를 하고 나왔는데 여든 고령에 담배를 물고 있다.
중국인들의 재미난 농담이 생각났다. ‘술도 담배도 모른 린뱌오는 60대, 술만 마신 저우언라이는 70대, 담배만 핀 마오쩌둥은 80대, 술과 담배를 모두 즐긴 덩샤오핑은 90대에 사망했고, 술과 담배는 물론 아편 중독 경력에 바람둥이였던 장쉐량은 100세를 넘겼다’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고 심지어 여자친구도 없던 레이펑은 23살에 사고로 죽었다’는 말까지 들으면, 입 꾹 다물고 던져주는 담배를 받고 술잔을 들 수 밖에 없다.
인근에 있는 식당으로 들어선다. CCTV의 유명 프로그램인 ‘쩌우벤쭝궈(走遍中國)’를 비롯해 많은 방송이 촬영한 장소다. 장완의 민간 요리를 먹을 수 있다. 방송을 보면 중국인에게 흔하지 않은 콩나물도 있고 호박꽃에 찹쌀과 고기를 싼 다음 쪄서 먹는 요리도 있다. 마당에서 펌프로 물을 퍼올린 아주머니는 고추를 씻고 있었다. 주방도 깨끗한 편이다. 다음에 갈 기회가 있다면 미리 주문하고 꼭 맛을 보리라 생각했다.
마작할 때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이유
바바후(把把壺) 파는 가게가 보였다. ‘마작하는 친구들이 좋아하는 물건(麻友們喜歡的東東)’이라고 쓰여 있다. 중국어로 물건은 ‘동서(東西)’라고 하는데, ‘동동’이라니 낯설다. 오행 수화금목토 중에서 식물인 목은 동방, 금속인 금은 서방에 위치한다. 고대 시장에서는 ‘목’과 ‘금’만 팔았기에 동서가 물건이 됐다. 직접 만들어 파는 바바후 재료가 나무이니 ‘동동’이라 했나 보다. 이 작은 주전자는 손안에 넣고 만지작거리는 장난감이다. 후(壺)는 푸(福)와 발음이 비슷하다. 마작에서 ‘복’은 곧 승리를 뜻한다. 마작 배우기가 생각보다 어렵지만, 후(壺)와 발음이 같은 후파이(胡牌)를 잡으면 이긴다는 정도는 안다. 트럼프 카드로 하는 ‘훌라’와 엇비슷한데 후파이를 한번에 다 잡으면 ‘이바후(一把胡)’라고 한다. 장난감 주전자에 담긴 돈에 대한 애착이 귀엽기만 하다.
골목에선 불을 피우고 물을 끓이고 있다. 그릇을 들고 나와 밥을 먹는 사람도 보인다. 중국을 다니다 보면 많은 사람이 밖에 나와 쪼그리거나 서서 밥 먹는 모습을 자주 본다. 물론 가족과 함께일 경우에는 거실에서 식사하겠지만 일하러 나간 식구가 있으면 혼자 먹게 된다. 어두침침한 거실보다 밝고 따뜻한 골목이 더 편하다. 누가 보든 말든 신경 쓰지 않는다. 시골로 갈수록 온 골목이 식당이고 이웃과 눈을 맞추는 사랑방이다. 더군다나 휘주문화를 꽃 피운 우위엔은 대부분 집성촌이 아닌가. 증조할아버지의 고향을 방문한 장쩌민이 지나더라도 밥그릇 들고 환호했을 사람들이 분명하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