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 미쓰비시 근로정신대 첫 배상 판결]
89세 김성주 할머니 먼저 간 동료들 떠올리며 눈물
절단기 작업 중 손가락 잘리고, 공장 무너져 친구 잃어
“공부 시켜준다 해서 일본으로 갔어요. 그랬더니 공부는 온데간데 없고, 공장에서 비행기 자르는 기계를 다뤘어요. 어느 날 그 기계에 손가락을 잘려서, 팔딱팔딱 시뻘겋게 떼어져 나갔는데, 옆에 있던 일본 놈이 그걸 들고 ‘오자미 놀이’를 하고 놉디다. ‘오, 손가락이 크구나’ 그러면서 공마냥 갖고 놀았습니다. 그때 피를 얼마나 흘리고 눈물을 얼마나 쏟았는지 몰라요.”
29일 대법원이 사상 처음으로 일본 기업 미쓰비시(三菱)의 근로정신대(식민지 여성들을 강제노역에 동원한 조직) 배상 책임 판결을 내린 직후, 김성주(89)씨는 기자들 앞에 서서 피눈물을 흘렸다. 1999년 일본 법원에 첫 소송을 낸 이후 일본과 한국 법원을 오가며 19년 동안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확정 판결이라 그 긴 시절을 삭혀 왔던 설움이 더 북받쳐 올랐다.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지 70년 만에 받아낸 승소의 기쁨보다, 귀국 후의 고초, 죽어간 동료들에 대한 회한을 떠올리며 그 동안 한ㆍ일 정부 어디서도 외면받았던 넋두리를 이제서야 쏟아냈다. 그는 소송을 낸 여섯 할머니 중 이날 법정에 출석해 끝을 볼 수 있었던 유일한 원고였다.
김씨가 일본에 일하러 간 때는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44년 5월. 전남 순천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김씨는 6학년 때 선생님으로부터 “일본에 가면 중학교에 갈 수 있고 돈도 벌 수 있다”는 권유를 받았다. 그리고 가족 몰래 도장을 가져다 ‘근로정신대’ 지원서에 도장을 찍었다.
그렇게 어렵게 건넌 ‘현해탄’ 너머에선, 꿈에 그리던 학교생활이 아닌 중노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열다섯 꽃다운 나이로, 미쓰비시중공업 나고야 항공기제작소 공장에서 절단기 작업을 했다. 한국에 있던 남동생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도 고향에 가지 못했다. 그러다 끝내 왼손 집게 손가락 끝이 절단기에 잘려나가는 사고를 당했고, 제대로 치료를 받지도 못한 채 귀국해야만 했다.
또 다른 원고인 양금덕(89) 할머니는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느라 그렇게 기다리던 재판 결과를 TV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70여년 전 양씨는 근로정신대에 뽑히자 날아갈 듯 기뻐했지만, 막상 일본에선 시너와 알코올 냄새가 가득한 페인트 작업장에서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1944년 12월 동남해(도난카이) 대지진 때에는 공장 천장이 무너져 쇠막대기가 옆구리를 관통하는 상처를 입기도 했다. 미처 빠져 나오지 못한 동료 6명은 그곳에서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
천신만고 끝에 돌아온 고향이었지만, 김씨와 양씨에게 고국의 대우는 차가웠다. 도움을 주긴커녕 ‘함부로 몸을 굴렸다’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양씨는 근로정신대로 끌려간 사실이 알려져 한차례 파혼을 당하고 다른 사람과 결혼했으나, 뒤늦게 이를 안 남편은 집을 나갔다. 김씨도 결혼 뒤 근로정신대 입대를 알게 된 남편으로부터 폭행을 당했다. 김씨는 “지금도 고향에 가면 정신대 할머니라고 손가락질을 한다”며 치를 떨었다.
이들은 1999년 3월 일본정부와 미쓰비시를 상대로 일본법원에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패소했고 2008년 11월 일본 최고재판소에서 패소가 확정됐다. 2012년에서야 한국 법원에 다시 소송을 냈고, 소송 6년 만에 감격적인 승소를 이루게 됐다. 또 다른 원고 이동련(88)ㆍ박해옥(88) 할머니와, 근로정신대에 끌려갔던 부인 김복례씨와 동생 김순례씨 사망 후 대리 소송을 냈던 유족 김중곤(94) 할아버지도 병환 등으로 재판에 나오지 못했다.
한편 같은 날 대법원에서 미쓰비시 강제징용 소송 승소 판결을 받은 할아버지 5명 대부분이 이미 세상을 떠나 그 후손들이 대신 참석했다. 고 박창화씨의 아들 박재훈씨는 “생전에 결말을 봤으면 좋았을 텐데, 2세들이 결말을 보게 되니 참담하다”며 “정부에서 적극적으로 대응해 억울한 사람들의 한을 풀어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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