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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내전 상처 깊은 차드, 분쟁과 빈곤의 굴레 벗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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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분쟁지역] 내전 상처 깊은 차드, 분쟁과 빈곤의 굴레 벗어날 수 있을까

입력
2018.11.30 20:00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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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드 분쟁의 원인은 식민지배의 유산 

 국가통치권 차지 위해 종교, 지역 갈등 충돌 

 수단과 리비아의 영향 불안요소로 작용 

[세계의 2008년 3월 이드리스 난시 차드 대통령이 알 바시르 수단대통령과 만나 불가침협정을 체결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세계의 2008년 3월 이드리스 난시 차드 대통령이 알 바시르 수단대통령과 만나 불가침협정을 체결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자료사진

아프리카 국가의 내전과 분쟁은 대부분 식민지배의 부정적 유산이 중요한 요인이다. 이런 점에서 차드는 식민지배의 그늘이 내전과 분쟁으로 연결된 대표적인 국가다. 프랑스의 식민지배는 민족 집단과 지역간 차별의식을 심어주었고 통합된 국민의식을 갖지 못하게 분열시켰다. 내전이 발생한 이후에는 식민종주국인 프랑스와 이웃하고 있는 리비아와 수단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차드 내전에 개입하면서 국제 분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러나 초대 대통령인 툼발바예 책임도 크다. 그는 식민지배 유산을 청산하고 차드 국민을 하나로 통합하려고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민족 집단의 갈등을 이용하면서 내전을 부추켰다. 독립 이후 차드는 국가의 통치권을 놓고 정권을 잡은 남부와 북부, 남부의 기독교와 북부의 이슬람으로 나누어 대립했고 이후 정권을 획득한 북부에 다시 파벌 간 내분이 발생, 복잡한 양상으로 갈등이 전개됐다.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랜 분쟁 중 하나인 차드 내전은 1966년 시작돼 1990년까지 2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1960년 독립 이후 툼발바예 대통령은 새로 임명되는 모든 공무원을 북부지역은 배제하고 남부지역인 사라인들로 채용하여 문제를 악화시켰다. 식민지배 시기 이전부터 북부지역이 소외되어 남북 간 갈등이 존재하고 있었는데 독립 이후에도 이러한 상황이 지속됨으로써 북부인의 불만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긴장은 1965년 대통령이 소(牛)와 개인 소득에 대한 세금을 신설함으로써 최고조에 달했는데 북부의 투부족이 툼발바예 정부에 저항하면서 불만이 표출됐다. 결국 1966년 6월 22일, 무슬림 지식인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인접국 수단에서 차드민족해방전선(FROLINAT)을 출범시키고 정부에 대항하면서 본격적인 내전이 발발한다. 여기에 리비아의 무아마르 알 카다피가 지역의 패권국가를 자처하며 FROLINAT에 군사지원을 하자, 열세에 몰린 중앙정부는 프랑스에 파병을 요청해 이후 차드 내전은 리비아와 프랑스가 개입한 국제분쟁으로 발전했다.

툼발바예 대통령은 북부의 이슬람을 소외시켰을 뿐만 아니라, 국회를 유명무실하게 만들었고 일당독재를 했다. 이러한 상황은 일련의 쿠데타와 정치적 불안으로 이어졌다. 결국 1975년에 펠릭스 말룸 장군이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으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됐다. 1979년 인접 5개국이 중재에 나선 끝에, 남북은 휴전 협정을 체결해 북부가 주도하는 국가통합임시정부(GUNT)가 수립됐다. 그러나 1980년 3월 FROLINAT 내부에 분열이 발생해 후세인 하브레가 이끄는 북부군(FAN)과 구쿠니 우에데이가 지휘하는 인민군(FAP)으로 나누면서 내전이 벌어졌다. 하브레는 미국 정앙정보부(CIA)로부터 1,000만달러를 지원받았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의 군사 지원을 받고 있었다. 하브레는 먼저 수도를 점령한 후 1982년 남쪽으로 진격하여 사르와 몬도우도 차지해 실질적인 통치자로 떠올랐다. 우에데이를 지원하던 리비아의 지도자 카다피는 1980년 군대를 파병하였고 1981년 차드의 합병을 선언했으나 아프리카통일기구(OAU)의 제지로 철수했다. 1983년 리비아의 지원을 받은 우에데이는 남쪽으로 진격했지만 하브레의 효과적인 게릴라 전술과 남의 나라에서 명분 없는 전쟁에 참여한 리비아군의 사기저하로 인해 패배하였다. 리비아는 1990년까지 분쟁 중인 북부 아우주 지역만 겨우 통제하는 상황이었으며 결국 하브레는 차드의 실질적인 통치자로 인정을 받게 됐다.

하브레는 1989년 차드의 통치권을 갖게 됐으나 통치과정에서 많은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했다. 하브레 집권 이후에도 반군 활동이 빈번했는데, 하브레의 승리를 위해 노력했던 이드리스 데비는 하브레에 대항하기 위해 다양한 세력들을 모아 애국적구국운동(MPS)이라는 반군을 조직했다. 하브레의 폭정에 차드의 정부군이 정권에 등을 돌리고 프랑스군이 중립을 선언하자 하브레는 카메룬으로 망명했고, 데비는 피를 흘리지 않고 수도에 입성하여 통치권을 확보했다. 하브레는 이후 2005년 4만명이 넘는 사람을 고문하고 살해한 반인륜적 범죄로 2015년 기소되었고, 아프리카의 ‘피노체트’로 불리던 하브레는 결국 세네갈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차드의 사례는 수단의 사례와 매우 유사하다. 그런데 왜 차드는 분리 독립하지 않았고 남수단은 분리 독립을 했을까? 차드는 뚜렷한 자원도 없고 경제적 가치도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변국인 리비아와 수단의 불안정한 상황으로 분쟁이 확대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정부군이나 반군 모두 우세한 세력을 갖고 있지도 못했고 이념이나 비전을 제시하지 못함으로써 계속해서 파벌 간 내분이 이어진 것도 하나의 원인이다.

차드는 데비 대통령 집권 이후 민주화 정책을 시행하여 전임자들과 달리 국제사회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반군 활동도 과거에 비해 잦아들어 전반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고 있다. 물론 일부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반군의 활동과 차드의 만성적인 가난으로 인해 데비 대통령의 정권 유지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2003년부터 남부 도바 지역에서 석유가 생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재정문제를 해소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여전히 차드 인구의 40%가 빈곤선 이하로 살고 있다.


특히 난민문제는 차드의 안정과 미래에 중요한 영향을 줄 것으로 보고 있다. 차드는 동부 지역에서만 약 6만명의 난민이 발생했다. 2017년 10월 현재, 차드 분쟁을 피해 수단에 32만명, 중앙아프리카공화국에 7만5,000명 이상의 난민이 살고 있다. 이는 불안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수단에서는 다르푸르 학살사태로 수천 명의 난민들이 차드로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다르푸르의 불안정한 상황 때문에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고 있다. 이 역시 차드에 부담이다.

데비 대통령은 1996년 이후 5선 연임을 했다. 비교적 민주적이지만, 장기집권이 이어지면서 차드 국민들의 반발이 일어나고 있다. 마하마트 누리 전 국방장관은 데비 대통령에 불만을 품고 북부의 무슬림을 규합하여 민주주의와 발전을 위한 연합(UFDD)이라는 반군을 이끌고 있다. 과거에 비해 반군의 공격이 현저히 잦아들었지만 여전히 계속되고 있으며 2006년과 2008년에는 수도가 반군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2015년 말에 테러 단체인 보코하람의 공격을 받았으며 수도인 은자메나까지 폭탄공격을 받아 차드 호수 지역에 비상사태를 선포하기도 했다. 만약 차드 통치력이 약화될 경우 보코하람의 지속적인 공격을 받을 수 있으며 이는 차드의 불안정을 가속화시켜 예측하지 못한 상황을 야기할 수 있다.

차드는 현재 프랑스가 주도하는 부르키나파소, 말리, 모리타니, 니제르 등이 참여하는 사헬(Sahel) G5에 참여하여 집단 안보와 경제 발전, 그리고 이슬람 극단주의 테러를 예방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차드가 분쟁에서 벗어나 국가 발전으로 향할 수 있을지 관심이다.

김광수 한국외대 아프리카연구소 HK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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