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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슬픔을 모른다면 비참한 공동체... 슬픔도 공부해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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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형철 "슬픔을 모른다면 비참한 공동체... 슬픔도 공부해야죠"

입력
2018.11.29 04:40
수정
2018.11.29 18:13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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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요즘 잘 운다고 했다. “뭔지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저의 공감 능력이 커지고 그런 건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슬플 것 같다 싶은 건 피해요. 못 보는 영화들이 꽤 있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아이 캔 스피크’ 같은 영화는 예고편만 보고 보는 걸 포기했어요.” 서재훈 기자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요즘 잘 운다고 했다. “뭔지 잘 모르겠어요. 갑자기 저의 공감 능력이 커지고 그런 건 아닌 것 같고요. 그래서 슬플 것 같다 싶은 건 피해요. 못 보는 영화들이 꽤 있어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를 다룬) ‘아이 캔 스피크’ 같은 영화는 예고편만 보고 보는 걸 포기했어요.” 서재훈 기자

그는 글 쓰듯 말하는 사람이었다. 천천히, 조심스럽게. ‘인간 오디오북’이 있다면 바로 그일까 싶었다.

문학평론가인 신형철(42)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그를 서울 세종대로 한국일보에서 만났다.

2005년 평론가로 등단한 그의 이름엔 두 가지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문단 아이돌’과 ‘제2의 김현’. 그에겐 문학평론가로는 이례적으로 ‘팬덤’이 있다. 평론집 ‘몰락의 에티카’(2008)와 산문집 ‘느낌의 공동체’(2011) ‘정확한 사랑의 실험’(2014)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2018)이 전부 널리, 뜨겁게 읽혔다. 섬세하고 정확한 글은 문학평론가 김현(1942~1990)의 글과 비교되기도 한다. 그는 그러나 기뻐하지 않았다. “그렇게 큰 글을 쓰는 분과 저를… 거의 막 미쳐버릴 것 같아요.”

그는 또한 그렇게 부끄러워하는 사람이었다. 수줍어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 지독하게 검열하는 사람. “글 쓰는 사람으로서 나는 작다는 걸 언제나 잊지 않아요.”

인터뷰하면서 그에게 들은 건 ‘정답’이 아니었다. 그는 ‘태도’를 말했다. “변해야 마땅한데 변하지 않고 있는 것들이 변할 수 있도록” 스스로를 다그치고 타인은 타이르는 태도. “타인의 슬픔을 향해 가려고 노력하는” 태도.

-‘인간이 배울 만한 가장 소중한 것과 인간이 배우기 가장 어려운 것은 정확히 같다. 그것은 바로 타인의 슬픔이다.’ 책에 그렇게 쓰셨네요. 슬픔을 왜 ‘공부’까지 해야 하나요.

“먼저 개인적 층위에서 얘기해 볼게요. 저는 문학을 하는 사람이에요. 슬픔을 몰라서는 안 되는 사람이고 또 모르지 않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모르고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되게 비참한 체험이었어요. 아내가 어떤 슬픔을 느끼는데 제가 모르는 게 괴로웠어요. 사랑하는 사람을 진짜인 말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으려면 그의 슬픔을 알아야 해요. 사회적 층위에서 보면 서로가 서로에게 폭력적인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예요. 요즘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슬픔에 잘 공감하지 못해요. 공감은 그냥 하면 좋은 게 아니라 못하면 큰 폭력이 될 수 있는 거예요. 우리 공동체가 참 비참한 공동체구나 싶어요.”

-‘슬픔학’ 같은 게 있는 게 아니잖아요. 슬픔을 어떻게 공부할 수 있나요. 문학에 길이 있을까요.

“슬픔의 현장에 가 보는 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슬픔의 현장을 연구하는 정혜신 선생님, 김승섭 교수님 책을 많이 읽는 건, 문학 안에 모든 게 있다는 착각과 오만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예요. 문학은 현장 다음의 차선책이 될 수 있겠죠. 문학은 ‘경험에 대한 비명제적 지식을 공유하는 장’이에요. 비명제적 지식은 자전거 타는 법처럼 직접 경험해 보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지식이죠. 그 경험에 그나마 가까이 가서 배울 수 있는 매체가 문학이에요.”

-세상이 나빠지기만 한다고 말하는 작가들을 많이 만났어요. 문학이 슬픔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해서인가요?

“글쎄요. 세상을 보는 카메라를 뒤로 쭉 빼서 보면 세상이 결과적으로는 좋아지고 있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데요. 더 중요한 건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고 믿는 거고요. 그걸 믿지 않으면 세상 모든 일의 의미가 ‘제로’가 되겠죠. 문학이 존재할 이유도 없을 테고요. 희망은 희망이 있다고 믿어야 생기는 거고, 그렇게 믿는 사람들 덕분에 희망이 생겨 왔다고 믿어요. 포기하고 냉소하는 건 쉽지만, 그걸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어요.”

-남성들이 여성들의 슬픔을 이해하지 않으려 하는 게 혐오로 나타나는 게 아닐까요. 책에 ‘2018년의 남녀’는 ‘남북’보다 결코 덜 중요하지 않다’고 쓰셨는데요.

“나름 페미니즘 좀 안다고 자신했어요. 그런데 사실은 하나도 아는 게 아니었다는 걸 최근에 알았어요. TV에 슬픈 장면이 나온다고 해 보죠. 바로 눈물부터 나는 사람과, ‘이걸 어떻게 판단해야 할까,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니까 아주 신중하고 섬세하게 판단해야지’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출발부터 다른 거예요. 남성들이 그 경험의 차이를 뛰어넘으려는 노력을 잘 안 해요. 오히려 이해 받고 싶어 하죠. 저도 노력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됐어요. 책 한 권 냈다고 신문 지면 얻어서 이런 말을 하는 게 부끄럽네요.”

-문단 내 성폭력 문제가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어요.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문인들의 작품을 어떻게 다뤄야 할까요.

“사실 잘 모르겠어요. 5년쯤 전의 저였다면, 절판이나 출고 중지 같은 조치를 빨리 하는 것에 무조건 반대했을 거예요. 진실의 복잡함에 대한 존중도 아니고, 그런 방식 자체가 폭력이니까요. 지금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고 봐요. 어떤 절차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폭로라는 방법이 동원된 거잖아요. 절박한 SOS로서 어떤 메시지가 겨우 세상으로 나왔을 때, 그 메시지에 최대한 빨리 응답하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이제는 들어요. 그런 작품이 존재하고 읽히는 것 자체가 2차 가해일 수 있잖아요. 물론 세상의 어떤 일도 빨리 처리해서는 지혜로운 결과가 나오긴 어렵다는 불안감도 여전히 있고요.”

-빨리 처리하느냐 마느냐의 차원이 아니라, 작가와 작품은 원천적으로 별개라는 주장은 어떤가요.

“역시 잘 모르겠어요. 중요한 건, 그런 논란으로부터 우리가 더 많이, 깊이 배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묻는 거예요. 한 작품이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건 작가의 사적 소유물이 아니라고 봐야 한다는 생각도 있고요. 그 작품은 우리가 충분히 논의하고 즐겨 왔고 앞으로 토론도 해야 하는데, 왜 작가가 가지고 가지? 그게 다 작가 것이라는 건가? 그렇게 묻고 싶은 거죠.

2015년 신경숙 선생 표절 때도 ‘표절 작가의 작품은 읽을 가치가 없다’ ‘다른 작품에도 표절이 많을 거다’ 하고 단정하는 분들이 있었어요. 저는 표절은 잘못된 거지만 표절과 무관한 그의 작품들은 여전히 중요한 작품이고 그 작품에 대해 내린 평가를 철회할 생각이 없다고 했었고요. 많은 분들에게 큰 반발을 샀지만 생각은 그대로예요. 신경숙의 소설은 20년간 대한민국 독자와 문단 전체의 것이었기 때문에 그걸 빼앗길 수는 없는 거예요.”

어떤 작가들은 "평론은 문학이 아니다"고 한다. 신형철은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다"고 했다. "저는 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거죠.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평론들을 꽤 많이 알고 있어요. 멀리 가면 김윤식 선생님 글은 예나 지금이나 문학이잖아요. 지금도 그런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고요." 서재훈 기자
어떤 작가들은 "평론은 문학이 아니다"고 한다. 신형철은 "나는 문학하는 사람이다"고 했다. "저는 평론은 문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인 거죠. 문학이라고 생각하는 평론들을 꽤 많이 알고 있어요. 멀리 가면 김윤식 선생님 글은 예나 지금이나 문학이잖아요. 지금도 그런 글을 쓰시는 분들이 많이 계시고요." 서재훈 기자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 나온 지 두 달 만에 2만부 넘게 팔렸다고 들었어요. 시대의 어떤 지점과 맞아 떨어진 걸까요.

“적절한 타이밍에 도착한 책이라는 생각을 해요. 사람들이 슬픔을 다룬 책을 기다리는 찰나에 마침 제목에서부터 ‘내가 바로 그 책이다’ 하면서 나타난 거죠. 슬픔은 고통이에요. 고통은 피하고 싶죠. 피하고 싶은 책이었다면 독자들이 쉽게 못 읽으셨을 거예요. 거꾸로 말하면 책이 밀도나 깊이 면에서 그렇게 지독한 지점까지는 못 들어갔다는 뜻도 되겠죠. 저는 슬픔을 가르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공부하는 사람에 불과해요. 그런 한계를 알기 때문에 제목을 ‘슬픔에 대한 공부’가 아니라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고 정했어요. 다음 평론집에서 슬픔을 더 깊이 다룰 거예요.”

-여성 팬이 많으시죠. ‘신형철처럼 섬세하게 생각하고 글 쓰는 남성이 지구상에 한 명이라도 있어서 다행이다’고 말한 지인이 있어요. ‘신형철의 글’은 어떤 글일까요.

“그런 말을 들으면 좀 심각하게 부끄러워요. 저는 기본적으로 작은 사람이에요. 큰 주제를 다룰 때도 작은 ‘나’를 통과시켜서 이야기할 수밖에 없어요. 큰 주제가 인간의 문제로 번역되는 순간, 제 삶의 영역에서 생겨나는 것과 관련 있는 문제라고 확 다가오는 순간들을 발견해내서 써요. 저는 제 글에 불만이 많은 걸요. 글쓰기 테크닉의 문제가 아니라 글 쓰는 사람으로서 작다는 생각을 늘 하니까요.”

-글 잘 쓰기가 시대의 화두이자 과제가 됐어요. 좋은 글은 뭘까요.

“여하튼 ‘다른 글’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람은 어떤 사람이나 세상에 다 있어야 하고 있을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요. 글은, 그보다 문학과 예술은 뭐든 다 있어도 좋은 건 아니에요. 예술은 지금까지 없던 걸 만들어내는 게 핵심이에요. 글이 생각의 층위에서 달라지려면 ‘내 안에 있는 누구와도 같지 않은 나’에 도달해야 해요. 거기까지 못 가니까 이미 나와 있는 이야기가 또 나오고 마는 거예요. 표현의 층위에서 달라지려면 생각이 에누리나 손실 없이 표현되는 정확한 문장이 발견될 때까지 버텨야 해요. 문장을 ‘쓰는’ 게 아니라 끝까지 물고 늘어져서 ‘찾는’ 거죠.”

-머리 속에서 모든 문장을 퇴고하고 말하시는 것 같아요. 말에 그렇게 조심스러운 이유는 무엇인가요. 어떤 분야의 전문가, 거장이 될수록 툭 던지듯 말하지 않나요.

“그건 최악의 말하기예요. 권력을 많이 가진 사람들은 커뮤니케이션에 별로 노력을 들이지 않아요. 짧게, 함부로 말해도 다 이해해 주니까요. 나이가 들수록 말이 권력의 말에 가까워져요. 말의 힘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준다는 거예요. 그 불균형한 커뮤니케이션을 의식하는 게 권력 감수성이죠. 말과 글이 일치하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해요. 그렇다면 글을 먼저 앞으로 보내고 말이 따라가자, 하는 거예요.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는 것도, 제가 오해 받는 것도 싫으니까요. 최대한 글처럼 잘 정리되는 말을 하려고 발버둥치는 중이에요.”

최문선 기자 moonsun@hankookilbo.com 김진주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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