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번 칼럼의 마지막 문장은 이랬다. “이제는 (과거와 달리) 구타나 고문 없이 교도소로 바로 보내줄테니, 여호와의 증인도 예전처럼 교도소에서 실형을 살았으면 좋겠다.” 칼럼의 전체 맥락을 살피면 분명 역설이었지만, 여호와의 증인이 실형을 살아야 한다는 것은 내 진심이기도 하다.
먼저 역설. 여호와의 증인 신도인 오승헌씨는 2013년 7월 육군 현역병 입영통지서를 받고도 입대하지 않은 혐의로 기소돼 1ㆍ2심에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지난 11월1일, 대법원은 오씨에 대한 원심을 깨고 무죄 취지로 사건을 하급심으로 돌려보냈다. 이에 따라 국방부는 대체복무 기간을 36개월로 하는 대체복무제 시안을 마련했다. 36개월 동안의 교정시설 합숙근무는 18개월 징역과 다를 게 없다. 징역 대신 대체복무를 했다고 해서 병역기피자라는 사회적 낙인이 사라질리 없으니, 예전대로 실형을 사는 것이 낫다.
다음은 진심. 한국 기독교가 ‘개독’이라는 야유를 받는 이유는 다른 나라에서는 상상도 못할 특혜와 영향력을 누리면서도 사회적 책임은 모르쇠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종교인 과세에 대한 저항과 교회 세습이다. 그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병역기피로 악명을 쌓아 왔지만, 실형이 그 악명을 상쇄해준 면이 있다. 국방의 의무를 팽개쳐서 지탄을 받기는 했지만, 신앙을 실천하면서 감수했던 희생이 그들을 경이로운 기독교인으로 만들었다. 그런데 대체복무제로 인해 여호와의 증인은 개독과 같은 반열이 됐다. 그러니 도로 실형을 사는 게 좋겠다.
한국 정부가 양심적 병역거부자 대체복무 제도를 만들라는 유엔인권이사회의 권고를 수용한 이후, 이 제도의 최대 수혜자인 여호와의 증인에 대한 궁금증이 폭증했다. 한국 주류 개신교계는 이들을 이단이라고 말하지만, 성서를 텍스트로 삼은 기독교 역사에는 이단이 있을 수 없다. 미셀 옹프레의 ‘무신학의 탄생’(모티브, 2006)은 성서를 가리켜 “그야말로 모순투성이로, 앞과 뒤가 서로 정반대의 내용을 말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각자의 필요에 따라 흑과 백, 낮과 밤, 선과 악을 정당화시킬 핑곗거리를 찾으면 된다. 누구나 자기 목적에 맞게 성서를 이용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단이 아니라 오로지 교세(敎勢)가 있을 뿐이요, 하나님의 자식됨과 예수의 제자됨은 교리나 성서 해석에 근거해서가 아니라 어떤 열매인가로 증명해야 한다. 이 기준에 따르면 수두룩한 ‘빤스 목사’를 비호하고 있는 교회가 이단이다.
대체복무는 무임승차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100만원의 빚을 진 사람이 100만원 상당의 현물로 빚을 대신했다면, 그 사람은 빚을 갚은 것이다. 대체복무를 마친 양심적 병역거부자는 총을 들지 않았을 뿐 병역의 의무를 치른 것이다. 그런데도 ‘군역의 노고는 똑같아야 한다’고 강변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군복무를 해 본 이들이 더 잘 납득하듯이, 군역의 노고는 결코 균질하지 않다. 누구는 전방에서 ‘빡센’ 군대 생활을 하고, 누구는 후방의 ‘널널한’ 보직을 꿰차고 호세월을 보낸다. 징병제에 포박된 국민이 국가에 요구해야 하는 것은 사병들의 근무 환경과 처우 개선이지, 대체복무를 징벌적으로 만드는 것에 있지 않다. 대체복무가 징벌적이 되면 될수록, 국방부는 사병의 근무 환경을 개선할 동기와 멀어진다.
국방은 신성한 의무라며 ‘닥치고 입대’를 내세우는 이들도 있지만, 여느 세상사와 마찬가지로 국방의 의무 역시 물샐 틈 없는 전체(all)가 아니다. 병역법은 생계유지가 곤란한 자나 예술ㆍ체육 병역특례요원 등에게 베푸는 무수한 입대 면제 조항을 갖고 있으며, 산업기능요원ㆍ공중보건의사 등에게 대체복무를 허용한다. 대체복무자가 교정시설에서 그 기간만큼 썩기를 바라는 것은 국가나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썩는다’는 표현은 교도관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 대체복무자들은 인력이 모자라는 곳에서 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어야 하고, 돌봄 기술 등의 전문 기술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일선의 전투원만 아니라 후방의 활용자원 모두를 동원하고 연계하는 총력전에는 그것도 국방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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