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1학년, 겨울방학 시작을 앞둔 1988년 12월이었다. 당시는 기말고사를 끝내고 방학을 맞이할 때 쯤이면 학교 차원에서 영화를 단체관람하는 게 일종의 대단한 문화체험이었다.
복합상영관이 아닌 단관 시절, 서울 시내에서 가장 큰 스크린을 자랑하는 극장은 퇴계로 대한극장이었다. 학생들이 다른 데로 샐까 염려하는 담임 선생님의 삼엄한(?) 감시 하에 친구들과 낄낄대며 극장안 객석에 앉았다.
영화가 시작되고 극중 청나라의 꼬마 황제 푸이가 어두컴컴한 자신의 방을 나서는 장면에서 절로입이 떡 벌어질 만큼 어마어마한 규모의 자금성 내부가 스크린에 펼쳐졌다. 한·중 수교가 이뤄지기 전, ‘죽(竹)의 장막’에 가려있던 중국을 일부나마 알게 되는 순간이었다. 우리말 제목의 ‘황제’가 영어로 ‘킹’(King) 아니냐며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던 고등학생들은 그때부터 넋을 잃고 영화에 빠져들었다. 바로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였다.
그 작품으로 국내 관객들과 가까워졌던 이탈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가 26일(현지시간) 향년 7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얼마전 한국을 대표하던 영화인 신성일이 세상을 떠난 데 이어 이번에는 이탈리아를 상징하던 거장의 사망까지, 올 한해 한국과 유럽 영화계는 소중한 국보급 자산을 잃었다.
20~30대 국내 관객들에겐 ‘몽상가들’로, 40대 이상에겐 ‘마지막 황제’와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로 익숙한 그다. 이 때문인지 베르톨루치 감독하면 야한 주제 혹은 오리엔탈리즘과 노스탤지어를 다뤘던 작가로만 알려져 있는 듯 싶다.
그러나 작품 세계를 돌이켜보면 혁명을 꿈꾸던 꽤나 급진적인 사상의 소유자였다. 공산주의자로 잘 알려진 시인 겸 감독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조감독으로 시작했던 이력과 초기작 ‘순응자’와 ‘1900년’에서도 알 수 있듯이 공공연히 코뮤니스트를 자처했었다.
미완으로 남은 프랑스 ‘68혁명’의 아이들 ‘68세대’답게 ‘파리에서의…’에선 극한의 허무주의적 시각으로 ‘성’(性)과 정치를 얘기하고, ‘마지막 황제’에선 오리엔탈리즘적 시선으로 청나라 마지막 황제 푸이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린 탓에 일부 평론가들의 비판도 받았다.
이후 ‘마지막 사랑’과 ‘리틀 부다’를 거치면서는 탐미주의에 경도된 듯한 인상도 받았지만, 뼛속 깊이 각인된 낭만적이면서도 혁명가적 기질은 후기작 ‘몽상가들’에서 다시 발현됐다. 극중 ‘68혁명’의 불구덩이로 뛰어드는 남녀 쌍둥이와 이들을 속절없이 바라보고만 있는 미국인 영화광 청년의 모습은 베르톨루치 자신의 젊은 날 양가적 자화상이기도 했다.
물론 예술가의 고결한 삶이라며 마냥 우러러볼 수 없는 행적도 있다. 말년에는 ‘파리에서의…’의 여자 주연 마리아 슈나이더가 촬영장에서 감독과 상대 연기자 말론 브랜도에게 성적 학대를 당했다고 주장해 명성에 오점을 남기기도 했다.
이 같은 오점에도 베르톨루치 감독이 세계 영화사에 큰 획을 그었다는 사실 만큼은 부인하기 어려울 듯 싶다. 개인과 사회, 섹스와 정치, 낭만과 혁명 등 좀처럼 엮기 힘든 상반된 이야깃거리들을 그토록 유려한 화법으로 풀어낼 수 있는 영화 작가가 지금 또 등장할 수 있을까.
그의 별세 소식을 듣고 떠오르는 질문이다.
조성준 기자 when914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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