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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석의 우충좌돌] ‘비정규직 제로’라는 엄청난 약속

입력
2018.11.28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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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희망고문 된 대통령의 정규직화 약속 

 민주노총, 비정규직 문제로 신뢰 잃어 

 정규직 호봉임금체계 변화 동반돼야 

민주노총과 청와대가 부딪치고 있다. 노무현 정부가 민주노총과 겪은 갈등, 그리고 촛불 시위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민주노총에 진 빚 때문에 청와대가 민주노총과의 충돌을 꺼린다는 해석이 재빨리 등장한다. 그런 점도 있겠지만, 노동ㆍ고용 정책에 대한 진지하고도 솔직한 접근이 부족하기에 갈등이 생긴다. 한 예가 ‘비정규직 문제 해결’이다. 취임 며칠 만에 대통령은 인천공항을 방문해 엄청난 약속을 했다. “임기 중에 비정규직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겠다고 약속한다. 우선 공공부문 비정규직 제로 시대를 열겠다고 약속을 드린다.”

공공부문부터 살펴보자. 공공기관들은 대통령의 지시를 무시할 수 없으니 최대한 거기 따를 것이다. 고용노동부 발표에 따르면 대상이 된 10만7,000명 가운데 절반 정도가 정규직으로 전환됐다고 한다. 이 통계만 보면 그런대로 잘 돼 가는 듯 보이지만, ‘공공기관에서의 비정규직 제로’는 여러 문제에 부딪치고 있다. 인천공항에서 정규직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반대하며,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비리가 있었다는 보도도 있었다. 서울교통공사에서도 고용비리가 터져 나왔다. 예산 증액을 포함해 정부가 정규직 전환을 전적으로 책임지겠다고 나선다면 모르겠지만, 정부는 최소한의 가이드라인만 정해주고 노사가 협의하라고 한다. 그래서 실제 지금까지 정규직으로 전환된 예들의 대부분이 ‘진짜’ 정규직이 아니라 무기계약직이라고 한다. 무기계약직으로 전환되면 고용은 안정되지만, 임금 수준은 기존 정규직과 차이가 난다. 고용이 안정됐으니 나아졌다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임금 격차에 대한 불만이 제기된다.

여기에 민주노총의 문제가 있다. 그들이 노동 문제에서 커다란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비정규직 확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크게 기여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정규직 조직을 보호하는 데 몰두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임금이 높은 현대차 같은 현장에서는 조직을 유지하느라 비정규직 문제에서 융통성이나 적극성을 보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인천공항에서 정규직 대부분은 한국노총 소속인 반면, 비정규직 다수는 민주노총 소속이다. 그런 만큼 민주노총의 요구는 강하지만, 일반적으론 민주노총이 일관성을 가지고 비정규직 문제를 다뤘다는 신뢰는 크지 않다.

임금 격차는 큰 문제다. 그러나 정규직의 호봉 급여체계가 유지된 채, 전환되는 비정규직이 동일한 임금 체계를 요구한다면 정규직 전환은 높은 벽에 부딪칠 것이다. 예산이 늘어나지 않는 상태에선 정규직이 반대할 터인데, 그걸 단순히 기득권의 표현이라고 비난할 수 있을까? 결국 연공서열 방식의 정규직 임금체계에 변화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도 이 문제에 대해 진지하고도 솔직한 논의는 없었고, 듣기 좋은 말이 그냥 정책이 됐다. 전반적으로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할 뿐 아니라 앞으로도 나아지기 힘든 상황에서, 그리고 노동자 절반의 평균연봉이 2,300만원이 안 된다는 상황에서, ‘비정규직 제로’라는 희망은 사람들에게 고문이 되고, 정책은 혼란을 야기하고 있다.

‘비정규직 제로’라는 성급한 구호와 약속에도 문제가 있다. 매우 좋은 말로 보이지만, 책임지기 어려운 말이다. 선의가 있다고 될 일도 아니며, 선의의 강조는 오히려 문제를 만든다. 대통령의 약속도 이 말의 함정에 빠진 듯하다. 정부 재정으로 책임지기 힘든 상황에서, 희망만 부풀려졌다. 정부가 재정을 확대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재정확대가 쉬운 일인가? 또 민간 부분의 정규직 전환은 현 상황에서 일어나기 힘들 것이다. 공공기관 비정규직이 전체 비정규직의 6%에 지나지 않는 상황에서, 또 공공기관 임금도 높은 상황에서, 공공기관만 좋아진다면 민간 비정규직의 불만은 더 커질 수도 있다. 이제라도 이 문제들에 대해 제대로 논의해야 한다. 듣기 좋은 말의 이벤트가 정책의 신뢰를 갉아먹게 내버려 둔다면, 정부는 무능에 대해 비싼 대가를 치를 것이다.

김진석 인하대 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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