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판은 이름표다. 불특정 다수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가장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는 장치다. 뭐 하는 곳인지, 어떤 곳인지 주절주절 설명하지 않아도 간판만 보고 입장 여부가 정해졌다. 그러니 간판은 이름뿐 아니라 형태도 공간 성격에 따라 다르다. 유흥업소는 주로 밤에도 단번에 눈에 띄게 형형색색 화려한 전광판을, 음식점은 음식 이미지를 넣은 입맛 돋우는 간판을 내걸기 바빴다. 자고로 간판은 크고, 화려하고, 눈에 잘 띄고, 명료하고, 자극적이어야 했다. 그래야 사람들이 많이 찾고, 명소가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요즘 잘나가는 가게들엔 간판이 없다. 있어도 눈에 띄지 않거나 뭐 하는 곳인지 일절 설명이 없다. 그래도 사람들이 북적댄다. 숨은 보물찾기 하듯 가게를 찾아 인증한다. 요즘 뜨는 명소들은 손맛이나 목 좋은 곳이 아니다. 찾아오는 방법부터 공간이 가진 매력을 느낄 수 있는 문화적 만족감까지 충족시켜 줘야 비로소 명소가 된다.
◇간판 없는 가게들
주말인 25일 오전 서울 익선동 골목을 찾았다. 오가는 사람들이 붐볐다. 연인, 가족, 관광객들이 좁은 골목에서 연신 두리번거렸다. 골목 군데군데에는 사람의 긴 줄이 늘어섰다. 골목길이 마주하는 모서리 옆. 붉은 벽돌 담장에 프라이팬과 국자가 걸린, 부엌 장식장을 닮은 문 앞에도 사람들이 줄을 섰다. 문 옆에는 ‘파스타, 피자, 와인, 맥주’라고 적힌 나무판자가 무심히 벽에 기대있다.
어떤 설명도 없는 이곳은 정종욱(30), 우동훈(30), 신연재(30) 공동 대표가 함께 운영하는 이탈리안 음식점 ‘간판 없는 가게’이다. 문을 살며시 밀고 들어서면 옛 한옥을 살짝 고쳐 만든 공간이 나온다. 형태는 고스란히 살리되 내부 벽은 허물고 벽지를 떼내 인테리어만 살짝 바꿨다. 벽에는 청색 테이프로 아무렇게나 붙인 메뉴판 종이가 달랑거린다. 아니나 다를까. 메뉴판에도 음식을 설명하는 문장 한 줄 없다. 정 대표는 “음식이 맛있으면 아무리 불편해도 찾아간다”며 “본질인 맛에 집중하기 위해 간판을 달지 않았다”고 했다.
간판은 없지만 찾아오는 손님이 하루에 200~300명에 이를 정도로 익선동의 ‘간판 스타’가 됐다. 정 대표는 “지난해 7월 문을 열었을 때만 해도 이렇게 붐비지 않았는데, SNS에서 입소문을 타면서 손님이 크게 늘어났다”며 “20대 연인과 여성분들이 많이 오고, 50대 이상 장년층도 모임을 종종 한다”고 했다. 요즘엔 오히려 사람들이 너무 늘어 걱정이다. 한적하고 여유로웠던 분위기가 사라질 수 있어서다. 이곳을 찾은 우경진(27)씨는 “간판이 없어도 요즘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찾는 건 시간문제”라며 “숨어 있는 공간을 찾는 재미가 크다”고 했다.
서울 한남동 주택가에 있는 카페 ‘r.about(아러바우트)’도 꽁꽁 숨어 있다. 무너질 듯한 콘크리트 담벽 뒤 나무로 된 오래된 문에 흰색 테이프를 쭉쭉 찢어 만든 ‘커피집’이란 글자만 달랑 붙어 있다. 내부는 옛집의 형태를 그대로 보존하고 LP판과 전축, 옛 선풍기와 난로 등 빈티지 소품을 두어 아늑하고 비밀스러운 느낌을 살렸다. 2016년 카페를 연 윤성수 대표는 지난달 신사동에도 간판 없는 ‘아러바우트’를 또 냈다. 화려한 간판 사이에 오히려 벽을 검게 칠한 간판 없는 신사점의 외관이 외려 눈에 띈다. 윤 대표는 “인위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공간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간판을 달지 않게 됐다”며 “맛있는 커피를 제공하면 간판이 없어도 사람들이 온다”고 했다. 신사점도 손님이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대형 패션 브랜드들도 과감히 간판을 뗐다. 안경 브랜드 ‘젠틀몬스터’가 2015년 5월 선보인 서울 계동 매장은 간판이 없다. 옛 목욕탕을 개조해 만든 이곳은 바깥 외벽엔 예전에 썼던 타일을 그대로 붙여두고, 입구만 번쩍대는 철판을 덧대었다. 지난해 3월 신사동에 문을 연 젠틀몬스터 신사점도 간판을 없앴다. 네모 반듯한 검은 상자 형태와 비슷해 건물 입구는 깊숙이 파묻힌 듯한 느낌을 준다. 오가는 이들의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내부는 미술관처럼 다양한 작품으로 꾸며졌다. 젠틀몬스터의 계동 매장 내부는 목욕탕을 그대로 살렸다. 욕탕을 그대로 둔 것은 물론, 탕에다 물을 길어 올렸던 대형 장비나 탱크를 그대로 놔둔 채 안경과 선글라스를 전시한다. 젠틀몬스터 측은 “이 매장은 남겨진 것과 새로운 것의 공존을 콘셉트로 꾸몄다”며 “기존 목욕탕 공간에 브랜드 정서를 담아 ‘창조된 보존’의 개념을 재현했다”고 했다.
신사동 가로수길 대로변에 있는 패션 편집숍 ‘메종 키츠네’ 입구는 아예 대나무숲에 가려져있다. 매장에 들어가려면 마치 대저택에 들어가는 것같이 큰 나무 문을 지나 숲길을 통과해야 한다. ‘메종 키츠네’라는 이름은 정원에 심어진 나무 뒤 유리창, 건물 외관에 무심한 듯 단순하게 쓰여 있다. 정원에 들어선 손님들은 앞다퉈 인증샷을 찍기 바쁘다. 1층은 카페, 2~4층은 옷ㆍ신발 등을 파는 매장이다. 임지연 삼성패션연구소장은 “상업공간들이 간판을 앞세우기보다 공간 자체가 주는 재미를 추구하는 것이 최근 2, 3년의 흐름”이라면서 “단순히 물건만 파는 게 아니라 취향과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경험을 제공하려 한다”고 말했다.
◇‘아는 사람’만 모이는 공간
궁금증을 유발하려는 게 아니라 ‘간판 하나로 우리 공간을 규정할 수 없다’는 의미로 간판을 안 달기도 한다. 한가로운 한남동 주택가의 붉은 벽돌 건물 1층 커다란 유리문 뒤에 사람들이 오밀조밀 앉아 있다. 2년 전 문을 연, 독일 보난자 커피를 판매하는 카페 ‘more than less’(모어댄레스)다. 우상규 대표는 “오만해 보일진 몰라도 ‘아는 사람만 와라’는 메시지를 주려고 간판을 달지 않았다”며 “제 개인적인 취향으로 꾸몄고, 이런 취향이나 감성을 가진 사람을 만나기 위해 공간을 만들었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여기엔 그가 고른 커피, 그가 고른 디자인, 그가 고른 제품이 놓여 있다. 주말이면 디제잉 파티가 열리고, 디자인 컨설팅을 진행한다. 우 대표는 “정보가 넘치는 시대에 몰라서 못 가는 곳은 없다”라며 “간판을 달아서 여기 어떤 곳이라고 설명하지 않아도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찾아서 오게 돼 있다”고 했다.
아러바우트도 커피만 파는 게 아니다. 아러바우트 한남에선 매주 연극 수업이 열린다. 영국에서 연극을 공부한 윤성수 대표가 기성배우들과 함께 일반인을 대상으로 연극을 알려준다. 윤 대표는 “커피를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연극을 좋아하는 누구나 쉽게 연극을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간을 마련했다”라며 “이곳에서 단순히 사고파는 행위만 이뤄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가 연출하고 일반인이 배우로 참여하는 ‘탈(脫)극장’ 연극은 내달 25일 아러바우트 무대에 오른다. 아러바우트 신사를 방문한 대학생 김아영(22)씨는 “커피 한잔 마시러 뭐 하러 굳이 발품을 팔겠나”라며 “카페 분위기도 보고, 이곳에 앉아서 커피 한잔 하다 보면 평소에 느끼지 못했던 것들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아러바우트는 영어로 회전 교차로(roundabout)라는 뜻이다. 회전 교차로처럼 이곳을 중심으로 여기저기로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하는 윤 대표의 바램이 녹아있다.
이 같이 비밀스러운 공간들은 과거 1920년대 미국의 금주법을 피해 꽃집, 미용실, 서점 등의 뒤편에서 불법적으로 운영됐던 ‘스피크 이지 바(speak easy bar)’를 연상시키고 거슬러 올라가 18세기 프랑스 상류층의 문화예술 사교 모임이었던 ‘살롱 문화’를 떠올리게 한다. 이향은 성신여대 서비스디자인공학과 교수는 “과거에 스피크 이지 바나 살롱은 어떤 취향이나 목적으로 그룹을 만들고, 거기에 속하는 연대감과 성취감을 바탕으로 유행했던 문화 현상이었다”라며 “젊은 세대는 SNS 해시태그 등을 통해 일종의 연대의식을 형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아는 사람’만 간다는 장소에 모이면서 문화적 만족감을 느낀다”고 설명했다.
강지원 기자 styl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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