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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정적(靜寂)] 의도(意圖)

입력
2018.11.27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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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첫눈이 하늘에서 한바탕 쏟아져 내려왔다. 눈은 온 세상을 순식간에 양털과 같은 흰색으로 덮어버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조그만 마당과 그 뒤편 멀리에 굳건히 자리를 잡은 산은 하늘이 내려준 하얀 옷을 입고 황홀하게 침묵한다. 산이 사시사철 언제나 늠름하고 매력적인 이유는, 자신에게만 온전히 몰입하기 때문이다. 때때로 찾아와 보금자리를 만드는 동물들을 마다하지 않고 기꺼이 환영한다. 산은 언제나 자신에게 온전히 몰입하기 때문에 숭고하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녀)는 자신이 도달해야할 목적지를 알고 있다. 매일 매일 그곳을 가기 위한 최적의 길을 발굴하여 묵묵히 걸어간다. 그는 자신이 올바른 길 위에 있다고 확신한다. 자신이 걸어가야 하는 길을 깊은 묵상을 통해 발견했기 때문이다. 이 길은 깊은 묵상을 수련하는 자에게 알려주는 선물이다. 그는 그 길에서 그를 이탈시키려는 매력적인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평온은 자신이 오랫동안 고민하여 만들어낸 멋진 삶의 지도인 ‘의도(意圖)’가 만들어 낸 내공이다. 평온한 사람은 마음속 깊이 은밀하게 ‘의도’한 어떤 것들을 말과 행동으로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우리는 일상을 누구나 공감하는 객관적인 사실로 경험하지 않는다. 일상의 경험들은 자신만이 지니고 있는 ‘의도’라는 마음의 상자 안에서 해석되고 경험된다.

로마시대 살았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기원전 4년~기원후 65년)는 인간의 위대한 삶을 위해 각자가 설계한 ‘의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는 로마 식민지인 스페인의 코르도바 출신으로 악명이 높은 로마 황제 네로의 스승이자 고문이 될 정도로 성공한 정치가이자 철학자였다. 세네카는 네로 황제 암살을 기획하고 있다는 ‘피소의 반란’에 연루되어 자살을 명령받고 생을 마쳤다.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세네카의 철학은 ‘말’이 아니라 ‘행동’과 ‘사실’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는 철학을 지겨움을 달래는 지적인 유희가 아니라 자신의 인격을 만들고 고양시키며, 인생을 혼돈으로부터 질서로 인도하고 자신의 행동을 제어하는 수련으로 여겼다. 철학은 그에게 자신이 반드시 해야 하는 일과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일, 상관하지 말아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그가 짧은 인생동안 완수해야할 임무가 있다면, 자신이 출렁이는 바다에서 항해하고 있는 배의 선장이 되어 조타를 잡고 올바른 해로로 배를 인도하는 것이다.

세네카는 로마의 곡식관리 책임자인 친구 파울리누스에게 ‘인생의 짧음에 관하여’라는 편지를 49년에 썼다. 인생은 불평을 하고 산다면 짧지만, ‘의도’를 지니고 차근차근 실천한다면 충분히 길다. 어떤 사람들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시간을 눈으로 볼 수 없고, 손으로 만질 수 없기 때문에 그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돈과 재산을 증식하고 보호하기 위해 목숨을 걸지만, 보이지 않는 시간을 낭비한다. 현명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재산목록 중 시간을 가장 값진 것으로 여긴다. 그는 자신에게 할당된 하루라는 시간을 선용하기 위해 깊이 사색하여 하루라는 시간을 자기 삶의 중요한 단계가 되도록 정교한 청사진을 만든다. 사색과 의도는 하루라는 시간을 가치가 있게 만든다.

라틴어로 ‘시간’에 해당하는 단어들이 있다. ‘아에타스(aetas)와 ‘템푸스(tempus)’다. ‘아에타스’는 양적이며 객관적인 시간이다. 시계와 달력이 알려주는 하염없이 흘러가는 시간이다. ‘아에테스’안에서 사는 사람은, 자신의 내면을 사색할 여유가 없다. 그는 하루 종일 휴대폰이나 컴퓨터를 통해, 타인들의 일거수일투족에 탐닉하며 그들을 부러워하거나 시기하면서 소일한다. ‘템푸스’는 ‘아에타스’와는 질적으로 다른 종류의 시간이다. ‘템푸스’는 어떤 사건을 완수하기 위한 ‘결정적인 순간’ 혹은 ‘기회’다. ‘템푸스’는 원래 ‘자르다, 구별하다’라는 아주 오래된 인도-유럽어 동사 어근 ‘템’에서 파생된 명사로 ‘자신에게 감동적인 고유한 임무를 위해 구별된 절호의 기회’라는 의미다. ‘템푸스’는 과거는 사라지고 미래가 현재가 되는 ‘지금’이다.

오늘 하루는 또 다른 하루가 아니라, 한번 가면 다시 오지 않는 내 삶을 아름답고 멋진 작품으로 만들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나는 오늘을 지난 세월의 수많은 하루로 만들지 않고, 나의 미래를 위한 절대적인 징검다리로 만들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다. 나의 숭고한 ‘의도(意圖)’다. ‘의도’란 내 마음 속 깊이 간직한 심장(心)에서 흘러나온 미세한 소리(音)를 구별된 시간과 장소에서 들음으로 생겨난다. 의도란 자신을 위한 최선의 사치인 ‘고독’을 통해 숙성된 내면의 소리다. 그 음성은 내가 오늘 반드시 행해야 할 임무를 알려준다. 그 음성은 컴컴한 바다와 같은 하루를 항해하는 나에게 해도(海圖)를 제공한다. 나는 ‘의도’로 바다의 깊이, 해저의 지질을 감지할 뿐만 아니라 암초와 같은 장애물을 제거한다. 나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보낼 것인가? 하루를 항해할 나만의 지도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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