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시대의 마이너리티] <19> 비(非) 음주자
직장인 6년 차인 주정인(34)씨는 대학생 시절 신입생 환영회에서 ‘소맥’(소주와 맥주를 섞은 술) 딱 한 잔을 받아 마셨다가 정신을 잃었던 경험을 하고는 술을 입에 대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쓴다. 그날 술을 처음 입에 댄 주씨는 인근 지하철역 화장실에서 의식을 잃었다가, 아침에서야 눈을 떠 토사물과 흙탕물 등으로 옷이 엉망이 된 채로 겨우 귀가했다고 한다. 가족들은 저녁 내 전화를 받지 않는 주씨 때문에 학교와 자택 인근 병원 응급실을 밤새 돌아다녔다. 친구들은 이러한 주씨의 상황을 알지만 술자리나 MT가 있을 때마다 끊임없이 술을 권했고, 이에 못 이겨 한잔씩 받아 들 때마다 ‘블랙 아웃’ 현상은 반복됐다.
그나마 술 권유를 거절이라도 할 수 있는 친구들은 다행이다. 이전 직장에서는 권위적인 상사들의 음주 강요가 심해 이직을 결심하기도 했다. 주씨는 “상사는 물론 동기들까지 ‘사내 놈이 정말 단 한 잔도 못하느냐’며 회식 때마다 핀잔을 줬다”며 “술자리 모임에서 배제되거나 2ㆍ3차에서 빠지면서 의도치 않게 ‘아웃사이더’가 됐고, 자연스럽게 이직을 고려했다”고 토로했다.
술로 인한 질환 등으로 하루 평균 13명이 숨질 정도로 음주문화가 만연한 한국에서 비음주자들은 건강에 해가 됨을 무릅쓰고 술을 마시거나, 아예 술자리를 기피하면서 소외되는 일이 잦다. 26일 통계청의 ‘2018 사회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 간 술을 한 잔 이상 마신 사람은 65.2%에 달한다. 특히 남성은 이 비율이 77.4%(여성 53.4%)에 달해, 남성 10명 중 2명 정도만 1년 간 술을 마시지 않는 것으로 파악됐다.
◇’한잔만’ 강요에 신념마저 희롱 당하는 이들
과거에 비해 술 마시는 빈도가 많이 줄었다고는 하지만 한국사회에 음주 강요 문화는 곳곳에 남아 있다. 지난 9월 취업포털 인크루트가 대학생ㆍ직장인 1,119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 대학 시절에 억지 음주를 해봤다고 응답한 비율은 10명 중 7명(70.7%)에 달했다. 직장 생활 중에는 이보다 더 높은 73.3%가 음주를 강요 받았다고 했다.
이러한 환경에서 신념ㆍ종교 등의 이유로 술을 안 마시거나 신체 이상 반응으로 못 마시는 비(非)음주자들은 ‘별종’으로 취급 받는다. 종교적 신념에 따라 술을 마시지 않는 박수현(28)씨는 “기독교 신자마다 해석이 다르긴 하지만, 술을 먹지 않는 게 옳다고 여기는 나로선 술을 거절할 때마다 신념마저 희롱 당하는 경험을 자주 한다”며 “‘누구는 마시던데, 믿는 신이 다른 거냐’ ‘성경 어느 구절에 술을 마시지 말라고 써 있느냐’는 등 황당한 질문을 아무렇지 않게 한다”고 말했다. 3년 전 돌아가신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술을 먹지 않고 있다는 이국화(30)씨도 “술을 마시냐 마느냐는 개인 선택인데,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느냐’고 끈질기게 요구해 오는 사람들이 많아 아예 술자리를 피하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음주로 건강 이상 상황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이들의 사정은 더 하다. 직장인 최은우(29)씨는 “맥주 반 잔만 마셔도 온 몸이 새빨개지고 심장이 급격하게 빠르게 뛰면서 호흡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생긴다”며 “회식이나 술자리에선 이러한 이상 반응을 대놓고 티 낼 수가 없어 화장실이나 바깥에서 조용히 가라앉히고 다시 착석하곤 한다”고 했다. 얼굴이 빨개지거나 표정이 굳으면 ‘우스운 사람’으로 지목돼 어느새 자신이 술자리 안주거리가 돼 있기도 한다는 게 최씨의 설명이다.
◇비음주자=사회생활 못하는 사람?
통계청의 2018 사회인식조사에서는 절주ㆍ금주가 어려운 가장 큰 이유로 ‘사회생활에 필요해서’(40.5%)가 꼽혔다. 그만큼 술자리가 관계 맺기나 사회 생활에 꼭 필요한 매개로 인식되고 있다는 뜻이다.
이러한 인식은 성인이 된 직후 대학 생활을 하면서부터 주입되기 시작한다. 경기의 한 사립 고교 교사 김모(41)씨는 “술을 마시는 게 기분 좋은 일이 아닌, 힘이 드는 일인데 대학에서부터 술을 거부하면 성의가 없는 사람으로 여기거나 술을 못 마시면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문화가 가장 문제”라고 했다. 대학생 이모(24)씨도 “대학 때부터 강의 외 자리에는 무조건 ‘술’이 등장하기 때문에 여기에 익숙해지지 못하는 비음주자들은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게 된다”고 토로했다.
특히 직장생활을 하는 비음주자들은 주량 탓에 중요한 기회에서 배제되는 경험이 잦다고 입을 모은다. 정보통신(IT) 관련 중소기업에 다니는 김모(32)씨는 “중요한 거래처와 약속이 생겼는데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중요한 모임 성격에 맞지 않으니 빠지라’는 지시가 내려온 적이 있었다”며 “흔히 ‘술상무’로 불리는 주량 센 사람들은 업무에 실수가 있더라도 상사와 친밀도가 높기 때문에 어느 정도 용납이 되는 게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주량이 ‘능력’으로 인정돼 채용 과정에서 주량을 평가하는 곳도 여전히 존재한다. 취업포털 사람인이 지난해 12월 기업 인사담당자 239명을 대상으로 ‘신입 채용 시 활용하는 비공개 자격조건’에 대해 조사한 결과, 4% 정도가 ‘주량’을 꼽았다. 취업준비생 이모(27)씨는 “일부 분야에선 인성평가를 한다는 명목으로 합숙을 하며 술을 마시는 채용 과정을 거치기도 한다”며 “당당하게 ‘술을 못 마신다’고 말할 수도 없고, 술을 억지로 마셔 정신을 놓아 버릴 수도 없고 당황스럽다”고 씁쓸해 했다. 대학생 이다은(23)씨도 “술을 마시면 알레르기 반응으로 기도가 부어 오르는 증상이 있는데, 주변에서 ‘여성인데 술까지 못 하면 사회에서 불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우려하는 목소리도 많다”고 털어놨다.
대부분의 비음주자들은 술로 인한 크고 작은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술자리에 참석해 저마다 고군분투하기도 한다. 직장인 최모(29)씨는 “회식 자리에서 상사가 술을 채우라고 할 때마다 슬쩍 물이나 음료를 채워 넣는다”고 했고, 대학생 윤지희(21)씨는 “술 게임을 잘 익히고 일부러 주변 사람과 대화를 많이 해 술로 인한 공백을 메우고 분위기를 띄우려 한다”고 귀띔했다.
◇술은 마시면 는다? 무리한 음주에 사망까지 잇따라
비음주자들에게 공통적으로 맞닥뜨리는 술 좋아하는 사람들의 논리는 ‘술은 마시면 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신경학회 공식 학술지에 2015년 게재된 강보승 한양대구리병원 응급의학과 교수의 분석에 따르면, 한국ㆍ중국ㆍ일본 등 동아시아인의 약 40%는 선천적으로 알코올 분해효소의 활성도가 낮고, 소량의 음주에도 안면홍조, 메스꺼움, 졸음, 아침 숙취, 실신 등의 특이적인 생리반응을 나타낸다. 심지어 10% 정도는 분해효소가 전혀 생성되지 않는 유전자형을 갖고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후천적 노력으로도 주량을 높이기 힘들다는 것이다.
음주가 미숙한 이들에게 폭음은 사망에 이를 정도로 위험하다. 2016년 대전의 한 대학 신입생은 술을 잘 마시지 못했지만 선배들 강요로 2시간 가량 술을 마셨다가 다음날 동기 집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지난 4월에는 평소 주량이 소주 2잔 정도인 대기업 신입사원 A(27)씨가 경기 화성시 한 호텔에서 열린 워크숍에서 밤 늦게까지 술을 마시다가 침대에서 누워 자던 모습 그대로 숨진 채 발견되기도 했다.
알코올 중독치료 전문 병원인 다사랑중앙병원의 허성태 정신건강의학과 원장은 “술을 잘 마시면 사회성이 좋고 성격도 좋은 사람이라는 잘못된 선입견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다”며 “이 때문에 비음주자에 대한 음주 강요 등 음주 관련 문제를 간과하는 경향이 많아 자신과 주변의 음주 행태를 반복적으로 재점검 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이한호 기자 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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