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만 받습니다! 2~3일 걸린답니다!” 지난 토요일 밤 9시쯤 넘어서였으니 수백 번은 외쳤겠다 싶다. 서울 마포의 집 앞 편의점에 들어서자 황급히 외쳐대는 아르바이트생 목소리엔 짜증이 묻어 있다. 안내문을 써 붙여 놨어도 오가는 사람들마다 이리저리 물어본 모양이다. 뉴스는 대개 그냥 뉴스였을 뿐인데, KT 아현지사 화재뉴스는 직접 영향을 끼쳤다. TV, 전화, 인터넷 등이 일제히 끊겼다. 사람 안 상했으니 그나마 다행이라 위안하면서 덕분에 이번 주말은 스마트폰, 케이블TV, 유튜브 없는 ‘디지털 디톡스’를 해보겠거니 했다.
□ 번거로운 일의 연속이었다. 주말이면 동네축구 멤버 모으기에 여념 없던 아들 놈은 먹통이 된 전화기를 붙들고 망연자실하더니, 동네 대신 집안에서 하루 종일 공을 몰고 다녔다. 다른 집에선 아이 내보낼 때 공중전화 사용법을 일러줬는데, 정작 공중전화가 없어 연락이 안됐단다. 주말에 드라마, 예능을 몰아보던 아내와 처제는, 켜질 기미 없는 TV만 노려봤다. 주문도 결제도 안 되니 동네 중국집은 일찌감치 문 닫았고, 그나마 문 연 족발집은 매출 걱정이 한창이었다. 이 글을 써야 하는 나도 집에서 멀리 떨어진 카페를 찾아 나섰다.
□ ‘고양이 대학살’ ‘책과 혁명’ 등으로 유명한 로버트 단턴이 ‘책의 미래’(교보문고)를 낸 적이 있다. 최고의 책 전문가이니 디지털 시대 책의 운명에 대한 질문을 꽤 받았던 모양이다. 단턴은 1960~70년대 마이크로필름 열풍 얘길 들려줬다. 장서 규모를 감당치 못했던 도서관들이 책을 마이크로필름화한 뒤 실물 책은 버렸다. 30~40년 지나서 보니 실물 책은 그저 조금 더 낡았을 뿐인데 마이크로필름은 훼손, 도난, 분실이 극심했다. 편리하다고들 하지만, 그 편리만 좇으면 훼손, 도난, 분실 또한 편리해진다는 역설이다.
□ 올해 영화 화제작은 단연 ‘서치’와 ‘완벽한 타인’이다. ‘서치’는 부녀 관계 회복이라는 할리우드식 분홍빛을 칠했고 ‘완벽한 타인’은 정반대로 개인의 내밀한 속사정을 블랙유머로 풀어냈다지만, 두 영화 모두 디지털 기술이 인간의 무의식이 된 현실을 짚어내고 있다. 디지털 흔적을 잘 뒤져보면 이제 한 인간을 역추적해서 재구성해낼 수 있는 수준이 되어 버린 것이다. 디지털 흔적이 끊기면 존재 자체도 사라지는 걸까. KT 아현지사 사고를 보니 ‘디지털 디톡스’를 재미삼아 할 게 아니라 화생방처럼 훈련삼아 해야 하나 싶다.
조태성 문화부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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