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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위기 속 소신 지킨 인물을 연기…난 어떤 어른인지 돌아보게 됐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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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위기 속 소신 지킨 인물을 연기…난 어떤 어른인지 돌아보게 됐죠”

입력
2018.11.25 14:19
수정
2018.11.26 03:38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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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가부도의 날’ 김혜수

1997년 IMF당시 한국사회 그려

협상 나선 한은팀장 역할 맡아

김혜수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가공됐지만 IMF 협상 내용은 사실에 기반한다”며 “현재 우리가 겪는 경제 위기의 근원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김혜수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가공됐지만 IMF 협상 내용은 사실에 기반한다”며 “현재 우리가 겪는 경제 위기의 근원을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출연을 결심했다”고 말했다.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제공

“처음엔 비스듬히 누워 책장을 펼쳤어요. 그러다 이내 몸을 일으켜 자세를 고쳐 앉았고, 흘러내리는 머리를 핀으로 고정시켰죠. 1997년 IMF(국제통화기금)와의 협상 테이블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니. 국민은 전혀 몰랐잖아요. 시나리오를 읽어 나가면서 정말 너무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요.”

배우 김혜수(48)가 길게 내쉰 숨이 무겁게 내리깔렸다. 영화 ‘국가부도의 날’(28일 개봉)을 처음 만난 그날로 돌아간 듯 착잡한 표정이었다. 한국이 IMF 구제금융을 받기까지 막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IMF는 국제법까지 어기면서 누구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는지, 한국은 왜 굴욕적인 협상조건을 받아들였는지, 영화는 관객이 똑똑히 목격하게 한다. “오늘날 청년세대와 중장년층이 경제 활동에 좌절을 겪게 된 근원이 거기에 있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화가 나는 정도가 아니라 피눈물이 나는 것 같았어요.” 최근 서울 삼청동 한 카페에서 마주한 김혜수는 “이 영화가 꼭 만들어져서 많은 사람이 당시 상황을 알았으면 좋겠다는 마음뿐이었다”며 “제작진에 ‘잘’ 만들어달라고 부탁도 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제목 그대로 ‘국가부도의 날’은 1997년 IMF 사태 당시 한국 사회를 스크린에 소환한다. 내실 없이 몸집만 불린 부실 경제는 금융 위기를 불렀고 기업과 가정과 개인을 도미노처럼 연쇄적으로 쓰러뜨렸다. 그러는 사이 누군가는 위기를 막기 위해 분투했고, 다른 누군가는 소수 기득권을 위한 새 판을 짜려 했으며, 또 다른 이는 위기에 투자해 인생역전을 이룬다. 영화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김혜수)과 재정국 차관(조우진), 전직 금융맨 윤정학(유아인), 성실한 가장 갑수(허준호) 등 시대를 대변하는 네 인물의 서로 다른 선택과 신념을 직조하며 이야기를 펼쳐간다.

김혜수가 기억하는 1997년은 어땠을까. 그는 “굉장히 죄송스럽다”는 말부터 꺼냈다. “배우의 삶에는 큰 변화가 없었어요. 사회 분위기가 어두우니까 영화는 가볍고 경쾌한 작품이 많이 만들어졌죠. 뭔가 세상이 잘못되고 있다는 불안감을 느끼기는 했어요. 뉴스에선 연일 기업 부도 소식이 들려왔고 친인척 중에 타격을 입은 분도 있었으니까요. 하지만 제 경험과 기억은 그야말로 파편에 불과해요. 감히 말을 꺼낼 수도 없을 만큼요.”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영화 속 한시현의 경고는 21년 후 현실이 됐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가난한 사람은 더 가난해지고 실업이 일상이 되는 세상, 그런 세상으로 가서는 안 됩니다.” 영화 속 한시현의 경고는 21년 후 현실이 됐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김혜수가 한시현을 연기하면서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건 이런 부채의식 때문 아니었을까. 누구보다 빠르게 경제 위기를 예측하고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 협상장에서 IMF 총재(뱅상 카셀)와 맞서는 한시현의 분투에서 김혜수의 진심이 전해져 온다. 김혜수는 혹여 낯선 경제 용어와 영어 대사가 진심을 표현하는 데 장애물이 될까 봐 개인교사까지 두고 공부했다. 경제 용어를 입에 달라붙게 하려고 제작진에 경제 용어 해설집을 준비해 달라고 부탁하고 금융권 종사자를 초빙해 강의도 들었다. 영어 대사는 캐스팅된 지 2주 만에 준비를 시작해 5개월 뒤 촬영 시작 전날까지 매달렸다.

“굉장히 중요한 내용을 담은 대사이고 뱅상 카셀 같은 엄청난 배우를 상대하는 장면이라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어요. 영어가 불편하게 느껴지면 정확한 표현을 하기 힘들어요. 단어도 뜻이 좀더 쉽게 전달되는 것을 찾아서 대체하기도 했고요. 뱅상 카셀이 IMF 총재를 어떤 연기 톤으로 준비해 올지 모르니까, 미리 촬영장 상황을 예측해서 다양한 톤으로 한시현을 준비해야 했습니다. 덕분에 저와 호흡을 맞춘 영어 선생님도 연기력이 늘었어요(웃음).”

영화 ‘증오’(1995) ‘라빠르망’(1996) ‘블랙 스완’(2010) 등으로 유명한 프랑스 국민배우 뱅상 카셀은 시나리오만 보고 출연을 결심했다. 국난 극복을 위해 아기 돌반지와 할머니 가락지까지 내놓은 국민 덕에 IMF 구제금융을 어느 나라보다 빠르게 상환한 한국에 흥미를 느껴 당시 상황에 대해 조사도 하고 왔다고 한다. “모니터 화면에 바짝 붙어서 그분 표정을 봤는데 정말 대단한 배우라는 걸 실감했어요. 아주 섬세한 표현까지 놓치지 않으면서 공간을 장악하더군요. 이질감도 전혀 없었고요. 최고의 캐스팅이었다고 생각해요.”

김혜수는 최악의 선택을 막으려 IMF와 맞선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을 진정성 있게 그려낸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김혜수는 최악의 선택을 막으려 IMF와 맞선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을 진정성 있게 그려낸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오로지 실력으로 유리천장을 뚫은 한시현은 협상팀에 실무자로 들어가지만 보수적인 정부 관료들 틈에서 성차별을 겪는다. 김혜수는 “당시 여성의 현실이 그러했다”며 “그래서 되레 주인공이 여자라는 걸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다. “한시현을 설명하는 단어는 바로 원칙과 소신이에요. 자신의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다 보면 누구나 시스템과 부딪히게 돼요. 그가 여자라서가 아니에요. 성차별적 상황에 한시현이 흔들리면 이야기 핵심에서 어긋날 것 같아서 의식적으로 감정을 절제하려고 했어요.”

결국 피하지 못한 시대의 비극을 스크린에서 다시 마주하는 심정은 복잡다단하다. 하지만 한시현 같은 인물이 현실에도 분명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 작은 위안을 준다. 김혜수는 “끝까지 자신의 본분을 지킨 한시현을 보면서 나는 어떤 지점에 있는 어른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됐다”고 말했다. “요즘 초등학생들 꿈이 유튜버 아니면 건물주라고 하더군요. 어른의 피해의식과 욕망이 아이들을 부추긴 거죠. 저는 연예인이고 능력에 비해 혜택을 많이 받은 사람이라 이런 얘기를 할 자격은 안 되지만, 우리가 당시 상황을 복기하면서 지금 삶의 태도를 돌아봤으면 좋겠어요. 이 영화가 그런 역할을 할 수 있다면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해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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