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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요 인터뷰] 잠을 많이 자면 ‘워라밸’인가요? ‘나’를 중심으로 일해야죠

입력
2018.11.26 07:00
수정
2018.11.27 09:29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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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는 여성을 위한 커뮤니티, 선샤인 콜렉티브 홍진아 대표

※ 인터뷰에서 ‘아니요’를 찾아보세요. 크고 작은 ‘아니요’로 자신의 오늘을 바꾼 사람들을 만나봅니다.

투잡족 아닌 N잡러, 홍진아 대표가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로 일을 시작한 그는 8년간 6곳의 회사를 거쳐 올 가을 선샤인콜렉티브를 차렸다. 서재훈 기자
투잡족 아닌 N잡러, 홍진아 대표가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다. 커뮤니케이션 매니저로 일을 시작한 그는 8년간 6곳의 회사를 거쳐 올 가을 선샤인콜렉티브를 차렸다. 서재훈 기자

직장을 그만두는 일은 보편적 두려움에 속한다. 지금까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믿었다. 월급이 끊기는 것, 자신을 칭할 직함이 사라지는 것, 노바디(nobody)가 되는 것. 그러나 컴퓨터 한 대, 책상 하나만 있으면 일을 만들어내는 시대엔 이런 두려움도 과거의 감정이 되고 말았다.

직장, 직함, 직업의 경계를 넘나드는 ‘일 실험’을 하는 30대가 있다. 투잡족을 넘어 ‘N잡러(N개의 직업을 가진 사람)’라 자칭하는 홍진아(35) 선샤인콜렉티브 대표다.

그는 한때 회사 2곳을 골라 동시에 직장 생활을 했다. 두 곳 모두 마음에 들었기에 일주일 중 이틀은 한 곳에, 사흘은 또 다른 곳에 다녔다. 퇴근 후엔 여성 직장인들과 여성 사회 초년생들을 이어주는 강연을 진행했고, 스탠드업 코미디를 기획하기도 했다. 8년간 6곳의 직장을 거친 그는 올 가을 자기 회사를 차려 대표가 됐다.

‘일 실험’ 과정에서 그가 집중한 것은 ‘나’였다. “워라밸(일과 삶의 균형)이란 도대체 뭘까요. 잠을 많이 자면, 친구를 많이 만나면 일과 삶의 균형이 맞춰지는 건가요? 일과 삶은 분리될 수 없어요.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내’가 하고 싶을 때 하는 가능성을 높이는 거예요. 일을 덜 하는 것 보다, 일을 건강하게 하는 거죠.”

홍진아 대표가 지난해 다닌 회사 두 곳의 명함. 일주일에 이틀은 진저티 프로젝트에서, 사흘을 빠띠에서 일했다. 홍진아 제공
홍진아 대표가 지난해 다닌 회사 두 곳의 명함. 일주일에 이틀은 진저티 프로젝트에서, 사흘을 빠띠에서 일했다. 홍진아 제공

◇ “제가 월급 받는 걸 정말 좋아하거든요”

_스스로 N잡러라고 하는데, 하는 일의 성격이 뭔가

“주로 해온 일은 미디어 커뮤니케이션이에요. 회사가 만든 일을 밖으로 이야기하는, 대외 홍보직이죠. 처음엔 일반 직장인들처럼 일을 하면서 퇴근 후에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라는 거였는데, 2015년에 개그맨 장동민씨가 방송에서 한 여성에게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기 때문에” 싫다는 말을 했어요. 그때까지 전 스스로 페미니스트로 정체화한 적도 없는데, 그걸 보고 “어…?” 한 거죠.”

홍 대표는 그 길로 이 말을 영어로 번역한 ‘Go Wild, Speak Loud, Think Hard’ 문구를 새긴 에코백을 제작했다. 처음 찍어낸 100장은 40분만에 완판됐고, 2차로 제작한 100장도 20분만에 동이 났다. 지난해 마지막으로 제작한 에코백은 텀블벅에서 2,000만원 넘게 후원을 받았다. 이 문구를 새긴 에코백과 티셔츠는 2015년 이후 급팽창한 페미니즘 굿즈 시장의 시초로 꼽힌다.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에서 선보인 에코백. 영어로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라고 쓰여 있는 에코백은 페미니즘 굿즈의 시초로 불린다. 홍진아 제공
와일드블랭크프로젝트에서 선보인 에코백. 영어로 ‘설치고 말하고 생각하라’라고 쓰여 있는 에코백은 페미니즘 굿즈의 시초로 불린다. 홍진아 제공

_직장이 아닌 다른 분야에서 이 정도 성과를 내면 보통 그만두고 창업을 하는데

“아니요. 저는 직업이 꼭 하나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때 회사에서 하던 일도 누가 시켜서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제가 좋아하는 일이었거든요. 다만 회사에서는 퇴근 후에 제가 다른 일을 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어요. 당시 회사에서 저만큼 성과를 내는 사람이 없었는데도요. 결국 2016년 직장을 나왔고 몇몇 회사에서 입사 제의를 받았어요. 그 중 가고 싶은 회사가 ‘빠띠’ ‘진저티 프로젝트’ 두 곳이었는데, 둘 중 꼭 하나를 골라야 하나 싶더라고요. 메일을 보내 두 곳에서 모두 일하고 싶은데 가능하냐고 물었고, ‘한 번 해보자’는 대답을 들었어요. 저도 실험을 하고 회사도 실험을 한 거죠.”

_두 회사에서 일하면서 또 다른 프로젝트도 진행했나

“네. 지난해 10월에 시작한 ‘외롭지 않은 기획자 학교’예요. 3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느낀 건 여성들이 일터에서 사라진다는 거였어요. 대리에서 과장으로 다시 부장으로 자연스럽게 이동하지 못하고, 늘 다음을 고민하거나 중간에 사라져버려요. 저 역시 직장에서 40대 이후의 제 모습을 그리기가 쉽지 않았고요. 그래서 제 주변의 능력 있는 5~8년차 여성 기획자들을 여자 대학생이나 사회 초년생과 만나게 해주는 프로젝트를 구상했어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여자들에게 ‘5~10년 뒤 너의 모습이 이럴 것이다’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거죠. 능력이 생긴다면 서로를 끌어줄 수도 있을 거고요. 1차 땐 학생 12명을 모으느라 고생했는데, 2차 땐 12명 모집에 94명이 지원했어요.”

홍진아 대표가 19일 한국일보 본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누구보다 월급을 좋아한다는 그가 창업을 택한 것은 해외의 여성전용 코워킹 스페이스를 보면서다. 서재훈 기자
홍진아 대표가 19일 한국일보 본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 누구보다 월급을 좋아한다는 그가 창업을 택한 것은 해외의 여성전용 코워킹 스페이스를 보면서다. 서재훈 기자

◇ 일을 징검다리 삼아 뛰다

_하고 싶은 일을 다 할 수 있는데 창업을 한 이유는

“사실 창업 생각은 한 적이 없어요. 제가 월급 받는 걸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거든요(웃음). ‘외롭지 않은 기획자 학교’ 2기를 기획할 때도 퇴근 후의 프로젝트로 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미국과 유럽의 여성 전용 코워킹 스페이스를 본 거예요. 여자들이 모여 서로 연결되고 서로를 격려하며 일하는 곳이 생기는 걸 보며 영감을 많이 받았어요. 한 번 이 생각이 머릿속에 박히니 떠나지 않더라고요. 결국 올해 3월 다니던 회사를 정리하고 다음날 바로 뉴욕으로 떠났어요. 휴가 겸 여성 코워킹 스페이스를 둘러보러요.”

미국에서 시작된 여성 전용 코워킹 스페이스 붐은 현재 전세계로 번지고 있다. 뉴욕의 ‘더 윙’, 시애틀의 ‘더 리베터’, 런던의 ‘더 올브라이트’, 토론토의 ‘메이크 레모네이드’ 등이 유명하다. 한국돈 40만원대로 책상 하나를 빌려 자기 일을 하는 여성들이 그곳을 채우고 있다. 홍 대표가 뉴욕에서 본 것도 책상 하나, 선반 하나를 빌려 자기 사업을 하는 여성들이었다.

올해 5월 진행됐던 ‘외롭지않은기획자학교’ 2기. 직장인 여성들을 사회 초년생 여성들과 연결해주는 프로젝트로 학생 12명 모집에 94명이 지원했다. 홍진아 제공
올해 5월 진행됐던 ‘외롭지않은기획자학교’ 2기. 직장인 여성들을 사회 초년생 여성들과 연결해주는 프로젝트로 학생 12명 모집에 94명이 지원했다. 홍진아 제공

_그럼 ‘선샤인콜렉티브’는 여성 코워킹 스페이스인가

“자본이 없어서 코워킹 스페이스는 못해요(웃음). 대신 ‘아무데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빌라 선샤인을 만들었어요. 일하는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인데 12월부터 멤버십 서비스를 시작하려고 해요. 멤버로 가입하면 시간표를 짜줘요. 예를 들면 월요일엔 글쓰기, 화요일엔 투자 관련 강의 듣기, 물론 강사는 여자고요. 수요일엔 서울숲 같이 뛰기 등, 일하는 여성으로 살면서 필요한 콘텐츠를 제공하는 거예요. 장소는 그때그때 바뀌어요. 저희가 ‘빌라 선샤인’이 새겨진 간판을 들고 다니는데, 예를 들어 오늘 저녁 연남동의 모 서점에서 독서토론을 한다 하면 그날 거기가 빌라 선샤인이 되는 거예요. 핵심은 일하는 30대 여성들의 일터 밖 동료를 만든다는 거죠.”

_평생 직장의 개념이 희미해지고 있다. 일의 미래를 예측한다면

“저는 직장뿐 아니라 직업, 직종의 의미도 약해지고 있다고 봐요. 과거엔 한 업계에 들어가면 거기서 빙빙 돌며 죽도록 일했지만 지금은 출판계 마케터가 IT업계 마케터가 되기도 하고, 심지어 마케터란 직종 자체를 바꾸는 일도 흔해요. 이런 사회에서 중요한 건 일하는 사람의 주도성이에요. 자신을 중심으로 일을 해석하는 능력이요. 점점 짧아지는 일의 주기를 징검다리 삼아 뛰며 자신의 커리어를 변형해나가는 거죠. 직장이 아닌 ‘나’를 일의 중심에 두는 시대가 빠르게 오고 있는 것 같아요.”

_그럼 요즘 유행하는 ‘워라밸’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리겠다

“네. 전 워크라이프헬스라는 말을 더 좋아해요. 워라밸이란 도대체 뭘까요. 잠을 많이 자면, 친구를 많이 만나면 일과 삶의 균형이 맞춰지는 건가요? 일과 삶은 분리될 수 없어요. 그보다 중요한 건 내가 일하고 싶을 때,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가능성을 높이는 거예요. 일을 덜 하는 것 보다 일을 건강하게 하는 거죠.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일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봐요.”

일과 삶의 균형보다 “건강하게 일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홍진아 대표. 서재훈 기자
일과 삶의 균형보다 “건강하게 일하는 게 더 중요하다”는 홍진아 대표. 서재훈 기자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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