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피 상장사들이 지난 10년 동안 이익잉여금 비중을 급격히 늘리고 투자는 대폭 줄인 것으로 나타났다. 상장사들이 투자나 배당에 인색한 채 벌어들인 돈을 족족 곳간에 쌓아두는데 치중하면서 부작용도 적지 않다. 특히 최근 국내 주가 급락이나 헤지펀드의 경영권 위협 등이 과도한 이익잉여금 축적과 관련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2일 한국투자증권에 따르면 코스피 상장사들의 총자본 대비 이익잉여금 비중은 2007년 55.3%에서 지난해 74.8%로 20%포인트 가까이 증가했다. 이익잉여금은 주주출자금인 자본금과 더불어 기업 총자본을 구성하는 요소로, 당기순이익에서 배당, 임원 상여금을 제외한 돈이다. 다시 말해 당기순이익이 높거나 배당이 적으면 이익잉여금이 늘어나는 구조인데, 국내 기업의 이익잉여금 증가는 투자비용 지출 감소(당기순이익 증가)와 낮은 배당률(배당 감소)이 동시에 작용한 결과로 해석된다. 실제 모건스탠리캐피털인터내셔널(MSCI) 지수에 포함된 한국 기업들의 지난해 배당수익률은 1.7%로 영국(4.4%) 호주(4.4%) 대만(3.8%)은 물론이고 중국(2.3%) 일본(2.0%)보다 낮다. 국내 기업의 투자 부진은 코스피 상장사 자산 가운데 투자자산 비중이 2007년 27.3%에서 지난해 6.9%로 급감한 사실로도 확인된다.
상장사들의 과도한 이익잉여금 규모는 기업 적정가치 하락이라는 ‘부메랑’이 돼서 주가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주가순자산비율(PBR) 급락이 대표적 사례다. PBR은 기업 주가를 총자본(순자산)으로 나눈 값인데, 통상 시장에선 PBR이 1에 가깝게 하락하면 주가가 바닥을 친 것을 받아들인다. 하지만 지난달 코스피 폭락 때 상장사 전체 PBR은 2008년 금융위기(0.82배) 수준에 가까운 0.88배를 기록했다. 2011년 유럽 재정위기(1.02배)보다도 낮은 수치다. 위기라고 볼 만한 상황이 아닌데도 PBR이 1을 하회하면서 ‘여기가 바닥이 아니다’라는 신호를 증시에 보낸 셈이다. PBR 하락은 비대한 이익잉여금와 직결된다. 회사 적정가치를 뜻하는 주가(분자)에 비해 총자본 규모(분모)가 크다 보니 자연히 PBR 수치가 낮아지는 것이다. 유승민 삼성증권 투자전략팀장은 “2009~2011년 코스피가 상대적으로 높은 PBR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수출 호조가 기업 투자 급증으로 이어졌기 때문인데 지금은 정반대 상황”이라며 “성장산업 부재로 기업들이 투자를 꺼리면서 증시에서도 수익률 개선 가능성에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과도한 이익잉여금이 기업 경영권을 위협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지난 13일 현대차의 비대한 자본금을 문제 삼으며 배당, 자사주 매입 등을 통해 14조원 규모의 주주 환원을 요구한 것이 비근한 사례다. 최근 토종 사모펀드인 한국기업지배구조개선펀드(KCGI)가 한진칼 지분을 매입하는 등 국내외 행동주의 펀드의 활동 증가가 예상되는 상황에서 현금이 많고 이익잉여금 비중이 높은 기업이 이들 펀드의 타깃이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안혁 한국투자증권 연구원은 “기업들의 주주환원정책이 적극적으로 바뀌지 않고 이익잉여금 비중이 높아질수록 주가 바닥은 더 낮아질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세인 기자 sa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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