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사형 집행과 초토신 상소
◇내게 이럴 수가 있는가?
이기경은 이 같은 결과에 격분했다. 자신으로서는 그래도 이승훈을 지켜주려고 자신의 위험을 무릅썼고, 더구나 당시 반회 모임에 함께 있었던 다산은 아예 이름조차 거론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말을 맞추자고 다산에게 대답 내용을 미리 알려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의 진술을 미리 안 상태에서 이를 역이용해 자신을 무고죄로 밀어 넣고 자기들만 쏙 빠져 나갔다. 처사가 참으로 야비했다. 이자들이 내게 이럴 수가 있는가?
더 놀라운 것은 좌의정 채제공이 이기경 자신의 진술 내용을 취지와 정반대로 정리해서 임금께 보고했다는 풍문이었다. 경악한 이기경은 곧바로 채제공에게 자신의 진술을 기록한 문건을 보여달라는 편지를 두 차례에 걸쳐 보냈다. 채제공은 부모 상중에 있는 사람이 근신할 줄 모르고 두 차례나 편지를 보내 불손한 언사를 입에 올린 것을 나무라고, 분명하게 밝혀줄 테니 걱정 말라고 쏘아붙였다.
불안해진 이기경은 채제공의 아들 채홍원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그도 홍낙안과 같은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채제공은 그 후로도 여러 차례 임금을 뵙는 자리에서 이기경의 탄원 내용에 대해서 입도 뻥끗 하지 않았다. 채제공은 처음부터 이 이야기를 꺼낼 뜻이 없었다.
◇’죄인지충일기’와 튀는 불똥
한양에서 이 소란이 벌어지고 있는 사이에, 진산의 윤지충과 권상연은 1791년 10월 30일 아침부터 호남관찰사 정민시 앞에 끌려가서 문초를 받았다. 정민시는 11월 7일에 진산 사건의 전후 경과를 적고 심문 내용을 정리한 보고를 올렸다. 심문 과정에서 윤지충은 천주학에 접하게 된 경과와 사건의 경위, 그리고 자신의 심경을 자세히 적은 ‘죄인지충일기(罪人持忠日記)’를 작성했다. 그 내용은 다블뤼 주교가 쓴 ‘조선주요순교자약전’에 전문이 번역되어 실려 있고, 달레의 ‘조선천주교회사’에 전재되었다. 한글본은 현재 남아 있지 않다.
‘사학징의(邪學懲義)’ 끝에 부록으로 실린 ‘요화사서소화기(妖畵邪書燒火記)’는 1801년 신유박해 당시 천주교 신자 집을 수색해서 적발한 천주교 관련 도상과 교리서를 압수하여 불태우기 전에 압수품 목록을 적어둔 내용이다. 그 중 윤유일의 조카 윤현(尹鉉)의 집에서 압수한 엄청나게 많은 천주교 관련 서적 목록 중에 ‘죄인지충일기’ 1책이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이 기록이 실물로 존재했던 것은 틀림없다.
이들은 형벌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자신의 신앙을 증언했다. 후회하는 빛이 조금도 없었다. 정민시의 보고가 올라오자 두 사람의 처형을 주청하는 상소가 잇따랐다. 일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간행물 문제로 옭죄어 홍낙안을 잡으려 한 것이 이기경을 불러들이는 결과를 낳았고, 다시 이승훈과 권일신이 소환되었으며, 이제 다산에게 불똥이 튀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사형 윤허와 옹색한 법 적용
11월 7일, 실록에서 정조가 정민시의 보고를 읽고 나서, 형조판서 김상집과 참판 이시수에게 말했다. “좌상 채제공이 올린 차자(箚子) 중에 ‘두드려 흔든다(敲撼ㆍ고감)’는 두 글자는 특히나 개탄스럽기 짝이 없다. 그들에게 진실로 두드려 흔들려는 마음이 있다면 다만 그 죄목으로 죄를 주면 그뿐이지, 어찌 열거한 조목에다 고감이란 두 글자를 적어, 팔방에 펴보여서 먼저 문제를 일으키는 것처럼 한단 말인가? 어제 유생들의 상소에서도 또한 묘당에서 죄주는 것을 늦춘다고 말을 했던데, 대신은 마땅히 이를 허물로 여겨야 할 것이다. 이 일은 대신의 친지가 많이 관여되어 있으니, 대신이 어찌 종적의 혐의가 없다 하겠는가?” 채제공의 일처리 방식과 몸가짐을 나무라는 통절한 뜻이 담긴 말이었다.
다음날인 11월 8일 형조판서 김상집이 윤지충과 권상연의 처형을 주청했다. 정조는 어쩔 수 없이 이를 윤허했다. 이들에게 붙여진 죄명은 ‘대명률(大明律)’의 사무사술(師巫邪術)을 금지하는 조항 중 “무릇 모든 좌도(左道)로서 정도를 어지럽히는 술수나, 혹 도상(圖像)을 숨겨 보관하거나, 향을 피우고 무리를 모아 밤에 모였다가 새벽에 흩어지거나, 겉으로 착한 일을 하는 체하면서 민심을 선동하고 미혹시키는 경우, 괴수는 교형(絞刑)에 처한다”는 조문과, 발총(發塚) 조의 “부조(父祖)의 신주를 훼손한 자는 시신을 훼손한 법률과 비례한다. 자손이 조부모나 부모의 시신을 훼손하고 버린 경우에는 참수하되, 두 죄가 함께 발생한 때에는 무거운 쪽으로 논죄한다”고 한 조항을 적용했다. 두 사람에게는 달리 적용할 범법 사실이 없었으므로, 법 적용이 참으로 옹색하고 구차했다.
◇사형 집행과 때늦은 후회
정조는 이승훈에게 반성문을 제출케 했고, 권일신은 유배형에 처했다. 정조는 이것으로 진산 사건을 종결지을 작정이었다. “이제 처분이 이미 엄하니, 이른바 사학의 일은 결말지었다 할만하다. 다시 이러쿵저러쿵하는 말을 공거(公車)에 올려 번거롭게 응수하게 한다면, 도리어 일삼지 않는 의리가 아니다. 이것으로 분부한다.” 임금은 두 사람을 죽이고 관련자를 처벌했으니 더 이상 이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말라고 쐐기를 박았다.
정조의 명령서가 도착한 즉시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은 형장으로 끌려갔다. 두 사람은 형장으로 가면서도 예수 마리아의 이름을 불렀다. 윤지충에게서는 기뻐하는 표정마저 떠올랐다. 그는 마치 잔치에 나아가는 사람처럼 환한 얼굴로 의젓하게 걸어가며 천주교의 가르침을 설교했다. 형장에서 사형 집행 전에 관리가 한 번 더 배교하겠느냐고 물었지만 윤지충과 권상연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예수 마리아를 외치며 침착하게 누웠다. 망나니의 칼이 그의 머리를 단칼에 잘랐다. 권상연도 예수 마리아를 외치는 도중에 칼날이 번뜩 하더니 머리가 땅 위로 굴렀다. 1791년 11월 13일 오후 3시의 일이었다. 윤지충은 33세였고, 권상연은 41세였다.
한편 왕은 명령서를 내려 보낸 직후 이 일을 후회했다. 지급 인편으로 호남관찰사에게 보내 집행을 연기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명령서가 도착했을 때 두 사람은 이미 목이 떨어진 상태였다. 정조는 이 일이 향후 천주교 신자 처리에 나쁜 선례가 될 것을 염려했다. 우려는 맞아 떨어져 이후 천주교 신자들은 으레 이 조항의 적용을 받아 사형에 처해졌다.
◇이적과 기적
윤지충과 권상연 두 사람의 시신은 이후 9일간 방치 되었다. 천주교 신자들에게 본보기를 보이려는 뜻에서였다. 9일째 되던 날 매장 허락을 받고 친척과 벗들이 두 사람의 시신을 수습하러 왔을 때 그들은 놀라운 광경을 보았다. 시신은 마치 방금 전에 처형된 것처럼 부패의 흔적 없이 깨끗했다. 엄동이었는데도 몸에 경직이 오지 않는 부드러운 상태였다. 두 사람의 머리가 잘렸던 나무 토막에는 조금 전에 뿜어 나온 것처럼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사형 선고문이 새겨진 나무 판 위에도 선홍빛 피가 조금도 굳지 않고 흥건한 채였다.
이때는 방안의 그릇에 담은 물이 얼어붙을 정도의 혹한이었으므로, 이 놀라운 광경 앞에 모두들 할 말을 잊었다. 이를 보고 감동을 받아 신앙에 귀의하는 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들은 감격한 나머지 하늘을 향해 찬미와 기도를 올렸고, 여러 장의 수건에다 순교자들의 선혈을 적셨다.
놀라운 일은 더 있었다. 의사조차 손을 놓아 죽어가던 중환자가 피에 젖은 나무판을 담근 물을 마시고는 바로 자리를 떨치고 벌떡 일어났다. 사경을 헤매던 몇몇 사람들도 순교자의 피가 적셔진 수건을 만지자 금방 병이 나았다. 기적의 소문이 꼬리를 물었다. 사람들이 동요하며 웅성거렸다. 이들은 이듬해 윤유일과 황심 등이 다시 북경으로 갈 때 그 피 묻은 천 조각 몇 개를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하면서, 이 놀라운 일에 대해 세세히 증언했다. 이 내용은 1797년 8월 15일에 북경의 구베아 주교의 사천 대리감목 디디에르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아주 상세하게 적혀있다.
◇초토신 상소의 파장
윤지충과 권상연의 목이 떨어지던 날, 공교롭게도 이기경은 자신을 향한 부당한 모함과 채제공의 온당치 못한 일처리를 성토하는 장문의 상소문을 올렸다. 이기경은 당시 상중이었으므로 지극히 근신해야 마땅할 처지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무덤 앞에서 시묘하는 처지임을 빗대어 스스로를 ‘초토신(草土臣)’이라 칭하면서도 굳이 상소를 올렸다. 이것이 이른바 초토신 상소다.
그는 상소문의 서두에서, 처음 자신이 답변한 내용과 채제공이 올린 초기(草記)가 달라진 연유와, 이승훈 형제가 자신을 무함한 사실을 해명키 위해 이 글을 올리게 되었노라고 밝혔다. 처음 자신이 불려왔을 때 자신을 심문한 채제공의 질문이 마지못해 하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고, 1787년 당시 홍낙안에게 이승훈의 일에 대해 말한 사정을 짧게 사실만 대답하라고 하였으므로 묻는 말에만 대답했노라고 적었다.
하지만 이후 이승훈의 공술 내용을 보니 자신을 농락했을 뿐 아니라, 엄연히 있었던 사실인 정미년 반회조차 애초에 없던 일로 딱 잡아뗐다. 자신은 당시 그 자리에 함께 있었던 정약용과 강이원을 굳이 연좌시키지 않으려고 이승훈 관련 사실만을 얘기 했던 것인데, 그가 이렇게 나오니 자신 또한 전후 상황을 상세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이후 이승훈과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자세하게 진술하였고, 일의 진전에 따라 정약용이 자신에게 편지를 보내 지난 일을 사죄한 상황과 “이미 한 번 버렸으니 두 번 버리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는가마는 시험 삼아 다시 거두어 달라”는 편지를 보낸 일까지 적시하면서 본격적으로 다산을 끌어 들였다.
당시 심문을 마치고 돌아와 다산에게 편지해서, 반회의 일로 심문하므로 숨기지 못했다고 하자, 다산이 “서로 마음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답장을 보내온 일까지 적시했다. 이 상소문으로 인해 다산은 진산 사건의 수면 위로 처음 떠올랐다. 이기경의 상소문은 내가 저를 봐주려 했는데 저가 저리 나오니 나도 지지 않고 맞받아치겠다는 의지가 역력했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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