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행정처 ‘물의 야기 법관’ 리스트 파장
당시 행정처, 각급 법원장에 사무분담서 불이익 받도록 전달
이수진 부장판사 “원하는 사무분담 못 맡긴다는 지적 들어봤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눈엣가시’ 판사들에게 인사 불이익뿐 아니라 부당 인사 조치 후 법원의 주요 업무를 맡지 못하도록 사무 분담까지 불이익을 주는 조치를 취한 사실이 확인됐다. 판사 뒷조사(블랙리스트)를 부인했던 양 전 대법원장의 주장이 힘을 잃고 있다는 평가다.
20일 한국일보 취재 결과, 양 전 대법원장 시절 법원행정처가 ‘정기인사 법관 참고사항’ 문건을 작성하고 이른바 ‘물의 야기 판사’로 찍힌 블랙리스트 판사들에 대한 인사 후 각급 법원장에게 법원 사무분담 과정에서 문건에 적시된 법관들에게 불이익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행정처는 형사합의부 배치가 부적합하다거나 영장전담 등 주요 보직에 배치하면 안 된다는 취지를 전화상으로 각 법원장에게 전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검찰이 확인한 블랙리스트 판사는 11명이며, 수사 과정에서 더 늘어날 수 있다. 법원재판사무 처리규칙 등에 따르면 각급 법원의 재판사무 등에 관한 사무분담은 각급 법원장 권한에 속한다. 통상 사무분담은 각급 법원장과 수석부장이 상의해 정하고, 각 법원 판사회의의 형식적 동의를 구해 정해진다.
법원행정처가 ‘물의 야기 법관’으로 지목한 판사들은 대부분 양승태 사법부에 비판적 입장을 견지했던 것으로 확인됐다. △긴급조치 9호 피해자 손해배상 소송에서 대법 판례를 뒤집고 국가 패소 판결(김기영 현 헌법재판소 재판관) △법원행정처 ‘연구회 중복 해소조치’ 공지에 국제인권법연구회 견제 시도라며 진상조사 요구(김형연 청와대 법무비서관)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 1심 판결을 ‘지록위마(사슴을 가리키며 말이라 했다는 고사성어로 진실을 가리는 거짓이라는 의미)’라고 비판(김동진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하는 등으로 양승태 사법부의 판사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미스 함무라비’ 저자로도 알려진 문유석 서울중앙지법 부장판사는 세월호 참사 특별법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언론사에 기고해, 마은혁 수원지법 부장판사는 ‘긴급조치 비방’ 유인물 배포로 유죄 판단 받은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소송에서 국가 책임을 인정하며 대법원 잘못을 지적해 물의 야기 판사로 지목됐다. 박노수 전주지법 남원지원장은 양 전 대법원장이 제청한 박상옥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묵인ㆍ방조한 검사’라며 공개 비판해, 이수진 대전지법 부장판사는 상고법원 추진 등 제왕적 대법원장 체제를 비판해 문제가 됐다.
진보 성향의 우리법연구회 창립회원으로 2014년 서울중앙지법 단독판사회의 의장을 맡고, 법원장 주도 사무분담지침규정을 비판하거나(김예영 인천지법 부장판사)나 대법관 인사를 비판하는 글을 법원 내부 전산망에 올리고(송승용 수원지법 부장판사), 단독 판사회의 직선제 필요성을 주장한 것(이의진 제주지법 부장판사)도 문제 삼았다.
실제로 이수진 부장판사는 “대법원 재판연구관 근무 당시 정치적 성향 때문에 원하는 사무분담을 맡길 수 없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말했다. 문건에 적시된 일부 판사들도 사무분담 과정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고 했다.
서울중앙지검 사법농단 수사팀(팀장 한동훈 3차장검사)은 이달 초 압수수색을 통해 법원행정처 인사총괄심의관실에서 작성한 ‘물의야기 법관 인사조치 검토’ 문건을 확보, 직권남용의 피해자인 ‘물의 야기’ 판사들을 대상으로 인사 및 업무 불이익과 관련한 사실 확인 작업을 벌이고 있다. 한 지방법원 부장판사는 “사무분담은 법관의 법원 내 담당 업무를 지정하는 것으로, 법관 인사만큼 중요하다”며 “법원장 권한인 사무분담에 법원행정처가 관여한 것은 월권 행위”라고 말했다.
안아람 기자 oneshot@hankookilbo.com
김현빈 기자 hbkim@hankookilbo.com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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