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낙연 국무총리가 지난주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으로 시중은행장단을 초청해 오찬을 가져 화제가 됐다. 이 행사가 눈에 띄었던 것은 주체가 경제부총리나 금융위원장이 아니라 총리였기 때문이다. 처음 있는 이례적인 일인데다 실세 총리의 부름인 만큼 어떤 주문과 당부가 나올까 은행장들도 무척 긴장했을 것이다. 직접 손님을 오찬장으로 안내한 이 총리가 모두 좌정한 후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잡자 은행장들은 일제히 ‘습관처럼’ 펜을 들어 메모할 채비를 갖췄다. TV로 전해진 이 장면이 무척 어색하게 비쳤던 모양이다.
□ 한 언론인 후배가 페이스북에 관련 기사를 링크하며 고관대작들의 받아쓰기 행태를 꼬집는 글을 남겼다. “박근혜 시절 때는 장관이란 분들이 대통령 앞에서 그 짓을 하더니, 요즘은 총리 앞에서 은행장들이 그 짓을 하나”고 반문한 그는 “정답조차 없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수만명 직원을 이끄는 은행장들이 받아쓰기 하는 꼴이란…”이라고 개탄했다. 채용비리로 수사선상에 오른 몇몇 은행장들의 곤궁한 처지도 헤아렸다. 그가 ‘받아쓰기 금지법’을 만들자고 주장할 정도로 분개할 상황이었는지 궁금해 영상과 기사를 찾아보니 맥락은 좀 달랐다.
□ 은행장들이 받아쓸 태세를 갖춘 건 사실이지만, 이 총리가 “여러분을 모신 것은 일부 관행처럼 당부를 드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런 염려가 있으면 지금 나가셔도 된다”고 농을 던지면서 기류는 달라졌다. 그가 “감사드릴 게 네 가지이고 듣고 싶은 게 세 가지”라고 얘기를 이어가자 여기저기서 들었던 펜을 놓는 등 분위기가 한결 편해지고 실제 금융권 민원 등 많은 이야기가 자유롭게 오갔다고 한다. 이를 놓고 ‘이 총리의 넛지(nudge)식 소통 행보’라고 치켜세운 보도도 나왔다. 어쨌든 그 자리에서 일방적인 받아쓰기는 없었다.
□ 후배 글에는 많은 지지 댓글이 달렸다. 사회 곳곳에 뿌리박힌 낡은 관료문화에 화가 난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문재인 대통령은 취임 초 첫 참모회의에서 "대통령 지시에 대해 이견을 제시하는 것은 의무"라며 “정해진 결론 없고, 지위고하 구별 없으며, 받아쓰기 없는 '3무(無) 회의'로 실질적 토론과 합의를 이끌겠다”고 말했다. 과연 그런 문화가 정착됐는지는 의문이다. 최근엔 우리 보수언론이 북한 비핵화와 관련한 미국 주류언론의 보도를 ‘마구잡이 받아쓰기’ 한다는 비판도 나왔다. 결국 받아쓰기가 문제다.
이유식 논설고문 jtino5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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