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능이 끝났다. 지진도 없었고 수능한파도 없었다. 다행이다. 모든 과정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큰 고비를 넘긴 수험생들에게 수고했다는 격려를 보낸다. 성적이야 자기가 노력한 만큼 나올 거다. 가끔 가다가 요행으로 더 좋은 점수를 받을 수도 있다. 내가 그랬다. 반대의 경우도 있겠지만 대략 자기 실력대로 점수가 나온다. 자기가 얻은 점수를 얼른 납득하고 인정하는 것도 능력이다.
학력고사 세대인 나는 한동안 수능 문제가 발표되면 문제를 풀어보곤 했다. “음, 내 실력이 아직 녹슬지 않았군!” 하면서 스스로 위안하는 효과가 있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수능 문제를 살펴보기 싫어졌다. 해가 갈수록 점수가 점점 떨어졌기 때문이다. 설마 내가 그 사이에 멍청해지기야 했겠는가. 아이들이 점점 더 많은 것을 알게 되었고 더 똑똑해진 게 분명하다. 솔직히 말하자. 내가 요즘 젊은이들을 상대할 수 있는 유일한 경쟁력은 먼저 태어났다는 것뿐이다. 수능까지 갈 것도 없다. 신입사원을 뽑기 위한 면접에만 가봐도 금방 알 수 있다. 심사위원들은 요즘 젊은이들과 경쟁해서 결코 이길 수 없다. 그저 먼저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심사하고 있을 뿐이다.
매년 수능이 끝나면 회자되는 문제가 있다. 출제가 잘못 되었다는 주장이 대부분이다. 실제로 잘못된 문제는 거의 없다. 올해에는 국어 31번 문제가 화제다. 문제가 틀렸다는 게 아니라 터무니없이 어려웠다는 주장이다. 많은 수험생들이 힘들어했나 보다. 많은 언론이 “이게 국어 문제냐? 과학 문제지!”라는 논조로 비판하는 기사를 실었다. 주변 사람들이 내 의견을 물어서 어쩔 수 없이 오랜만에 수능 문제를 살펴봤다.
만유인력에 관한 복잡한 ‘보기’와 지문을 주고 잘못 설명한 선택지(①~⑤)를 고르라는 문제였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세간의 비판과는 달리 31번은 과학 문제가 아니라 국어 문제가 맞다. 과학 문제에는 그렇게 길고 지루한 지문이 필요 없다. 사람들에게 가장 익숙한 물리법칙을 하나 대라고 하면 대개 E=mc²이나 F=ma를 답한다. 이유는 간단하다. 길이가 짧아서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간단할수록 아름답다. 그게 물리학이다. 하지만 정작 법칙을 말로 설명하라고 하면 다들 어려워한다. 정말 어렵기 때문이다.
반대의 경우도 있다. “두 물체 사이의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하고 질량의 곱에 비례하는 힘은 무엇일까요?” 과학 강연에서 이렇게 물었다고 하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2초 안에 “만유인력의 법칙이오”라는 답이 쏟아져 나온다. 오히려 고등학생에게 물으면 주저한다. 혹시 무슨 함정이 있는 질문이 아닐까 하면서 의심을 하는 것이다. 같은 질문을 과학이 아닌 주제의 강연에서 성인에게 물어도 답은 금방 나온다. 만유인력의 법칙은 그만큼 익숙한 내용이다. 하지만 만유인력의 법칙을 공식으로 기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조금 길기도 하거니와 분수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31번 국어 문제는 일단 누구나 배운 바 있는 만유인력의 법칙을 소재로 삼았다. 문제에는 지문과 ‘보기’가 제시되었다. ‘질점’이나 ‘구 대칭인 구’처럼 낯선 용어도 나오지만 ‘보기’에 제시된 그림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었다. 낯선 용어의 뜻을 알아채는 것도 국어 실력이다. 31번은 지문에 대한 이해를 측정하는 문제다. 만유인력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된다. 심지어 ‘보기’를 읽지 않아도 된다. 지문을 이해하면 풀 수 있는 문제다.
재밌는 것은 31번 문제를 비판하는 뉴스와 신문 기사들은 ‘보기’와 선택지만을 보여줄 뿐 정작 지문은 보여주지 않았다. 지면의 제약이 없는 TV 방송의 뉴스마저 지문이 길다는 이유로 화면에 보여주지도 않았다. 지문이 ‘보기’보다 훨씬 짧은데 말이다. 결국 31번 문제 비판자들은 문제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했다는 걸 스스로 고백한 꼴이다. 왜 그랬을까? 과학 울렁증 때문이다. 과학을 다루는 내용만 나오면 멘붕에 빠지는 것이다.
나는 31번이 결코 좋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지문과 ‘보기’를 읽지 않고도 문제를 풀 수 있었기 때문이다. ②번이다. ③번 아래로는 읽을 필요도 없다. ②번이 내가 알고 있는 물리 지식에 어긋났다. 만유인력에 대한 사전 지식이 없어도 풀 수 있는 문제인 것까지는 좋은데, 만유인력에 대한 사전지식을 어느 정도 갖췄다는 이유만으로 남들은 긴 시간을 할애해서 풀어야 하는 문제를 순간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면 좋은 국어 문제가 아니다. 차라리 ‘보기’를 제시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더 좋았을 것이다.
국어 시험의 목적은 독해 능력을 평가하는 것이다. 당연히 문학 외에도 역사, 경제, 철학, 예술, 과학 등 모든 분야의 지문이 제시되어야 한다. 지문의 길이와 수준 그리고 질 역시 다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올해 수능 국어 31번 문제는 과학 문제가 아니라 국어 문제 맞다. 평소에 책을 많이 읽은 수험생이라면 충분히 풀 수 있는 문제다.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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