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이덕리는 누굴까. 이덕리를 추적한 오래된, 신기한 얘기다. 저자는 2006년 11월 ‘동다기(東茶記)’ 필사본 발굴로 한국을 떠들썩하게 했다. 그간 동다기는 우리나라 차문화를 상세하게 담은 다산 정약용의 책으로 알려졌으나 실물은 없었다. 그럼에도 다산의 책으로 추정한 건 다산과 교류가 깊었던 다성(茶聖) 초의선사(1786~1866)가 ‘동다송(東茶頌)’이란 글에서 동다기 일부를 인용했다는 점, 다산 스스로 강진 유배시절 차를 무척 즐겼다는 점, 최남선 등 유명 학자들이 동다기가 다산의 저작이라 했다는 점 등이 작용했다. 다산 자체가 워낙 다양한 분야에 대해 다양한 책을 쓴 ‘백과사전형 인간’이니 차에 대한 책을 안 썼다면 오히려 이상하게 보일 법도 했다.
그런데 저자는 동다기 필사본 공개 때 이 책을 쓴 사람이 ‘전의(全義) 이(李)’이며, 이 ‘전의 이’는 창덕궁 수비를 맡기도 했던 무관 이덕리(1728~?)라고 밝혔다. 잘못 알려졌던 책의 원주인이 확인된 셈이다. 그런데 뭔가 개운치 않았다. 계속 추적했다. 공교롭게도 당시 이덕리라는 사람이 3명 있었으며, 다시 한번 더 공교롭게도 이 3명 모두 족보에는 ‘덕필’ ‘덕화’ ‘덕위’라는 각기 다른 이름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어느 인물이 이덕리인지 다시 들여다보다 최종적으로 동다기를 쓴 ‘전의 이’는 ‘무관 이덕리’가 아니라 형 이덕사(1721~1776)의 대역죄 때문에 평생 유배지를 떠돈 불운한 선비 이덕리(1725~1797)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이덕필이 아니라 이덕위가 이덕리였다.
그렇기에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는 12년간 이어진 ‘이덕리 추적기’이자, ‘공식 정정 보고서’이자 ‘이덕리 복권 선언’이다. 이런저런 인연과 우연이 희한하게 교차하는 이덕리 추적의 묘미, 그리고 이덕리가 누구인지 최종적으로 확정했을 때 비로소 앞뒤가 착착 맞아떨어지는 다산과 이덕리간의 인연에 대해서는 책을 직접 읽는 게 낫겠다. 자료로 말하는 저자답게 각종 자료 그 자체를 고스란히 다 설명해뒀다.
형 이덕사가 죽은 건, 그 말 많은 사도세자 추숭 문제였다. 1776년 3월 10일 즉위한 정조는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 선언한 교서를 내린다. 이보다는 훨씬 조금 덜 알려졌지만 이 즉위교서의 결론 부분은 “이 교서가 내려간 뒤 귀신처럼 불량한 무리가 이를 빙자하여 추숭의 논의를 내세운다면 선대왕의 유교가 있으니 응당 해당되는 형률로서 논하고 선대왕의 신령께 고할 것이다”라는 점이다. 혈육으로서의 정은 있으나, 그렇다고 착각하진 말라는 얘기다.
말의 본뜻이 궁금하면, 자기 희망대로 해석할 게 아니라 그 사람의 구체적인 행동을 보면 된다. 형 이덕사가 대표적이다. 즉위교서 서두 부분에 주목해 그는 4월 1일 사도세자의 복권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렸다. 정조의 행동은 즉위교서 서두가 아니라 결론 부분을 따랐다. 이덕사를 그 날로 바로 잡아와 이튿날 능지처참해버렸다. 살 떨릴 정도로 과감하고 빠른 대응이다. 이 일로 이덕사의 가족은 뿔뿔이 유배됐다.
이덕리는 쉰하나이던 이 해에 진도로 유배를 가 20년을 살았고, 영암으로 이배됐다가 그곳에서 일흔두 살의 나이로 숨졌다. 이덕사의 상소문은 실록 등 모든 공식기록에서 삭제됐다. 저자는 이덕사 집안에서만 전해오던 이덕사의 상소문 전문도 입수해 공개해뒀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사도세자의 비극적 죽음과 정조의 즉위교서에다 어떤 판타지를 넣으려 하지만, 당시의 냉정한 현실은 이것이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그 뒤 이덕리가 쓴 저술이다. 동다기는 단순히 유배생활의 정신적, 육체적 괴로움을 덜기 위해 차를 마시면서 알게 된 차의 장점에 대한 책이 아니다. 포인트는 동다기와 함께, ‘기연다(記烟茶)’ 그리고 ‘상두지(桑土志)’란 책을 함께 썼다는 점이다. 상두지는 일종의 국방 개혁 백서다. 평화가 길어져 방비가 해이하니 뭔가 다시 긴장하자는 제안이다. 국방비를 어떻게 조달할 것인가가 문제다. 이덕리는 당시 널리 퍼진 담배를 억제하고, 그 대신 차를 국가가 전매해 비용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때문에 차의 효용에 대해서는 동다기를 쓰고, 담배의 해악에 대한 기연다를 썼다. 이 3권의 저술은 부국강병이란 맥락 아래 이어진 것이다.
잊혀진 실학자 이덕리와 동다기
정민 지음
글항아리 발행ㆍ436쪽ㆍ2만2,000원
이덕리가 이 같은 제안을 한 것은 당시 중국과 일본에선 차 문화가 발달해 차가 생필품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숭늉과 막걸리면 충분하다 여기면서 차를 마시지 않았고,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 자생하던 차나무를 잡목 취급하고 땔감으로나 썼다. 대신 담배가 널리 퍼져 너도 나도 안 피는 사람이 없었고 이옥(1760~1815)이란 사람은 담배가 얼마나 맛나고 좋은 것인지에 대해 ‘연경(烟經)’이란 책을 쓰기도 했다. 이덕리는 이런 분위기에 맞서 차를 키워 수출해 국방을 강화하자고 제안한 셈이다. 그냥 이러면 어떨까 제안하는 수준이 아니라 차를 어떻게 기르고 중국, 일본과 어떻게 교역을 틀 것인지 제 나름대로 상세히 적었다.
그렇다면 대역죄로 집안이 풍비박산 나고 자신도 20여 년을 유배당한 처지에 놓였던 이덕리에게 이런 저술 활동은 대체 무슨 의미였을까. 글 읽고 쓰는 자란 대체 어떤 존재인가, 다시 묻게 한다.
조태성 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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