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메르켈 총리, 유럽 의회에서
마크롱 대통령 주장에 발맞춰
나토 벗어난 전략적 독자성 확보
난민 문제 등 골칫거리 대응 목표
재원ㆍ신속 대응 등 난제는 많아
“남(미국)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던 시대는 지났다. 살아남으려면 우리 운명은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바로 진정한 유럽의 군대다.”
지난 13일(현지시간)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유럽의회. 연단에 선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독자 군대 창설을 강조하자 회의장에는 환호가 쏟아졌다. 동시에 한쪽에서는 야유가 터져 나왔다. 유럽군에 대한 기대와 우려를 상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앞서 6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러시아, 중국은 물론 미국의 위협에도 맞설 유럽 군대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며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얼굴을 붉힌 지 불과 1주일 만이다. 메르켈 총리는 한발 더 나아가 5개 상임이사국이 주도하는 유엔 안보리와 흡사한 ‘유럽 안보리’를 제안하며 “그래야 유럽연합(EU) 회원국 전체의 동의가 없어도 군대가 신속하게 개입할 수 있다”고 촉구했다. 유럽 대륙의 맹주이자 앙숙인 프랑스와 독일이 모처럼 의기투합해 군대 창설을 공식화하면서 한때 몽상으로 치부하던 EU의 오랜 숙원이 본 궤도에 올랐다.
유럽의 목표는 ‘전략적 독자성’을 확보하는 것이다. 미국과 영국이 주도하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에 대한 불만이 깔려 있다. 냉전 시절 나토는 구소련의 군사 공격에 맞선 든든한 방패막이였다. 하지만 테러를 비롯해 다양한 위협에 직면하면서 곳곳에서 안보에 구멍이 뚫렸다.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중거리핵전력조약(INF) 탈퇴 선언은 유럽의 들끓는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뉴욕타임스(NYT)는 “나토가 일일이 대응하지 않는 작은 규모의 군사작전에 독자적으로 군대를 투입해야 한다는 게 유럽인들의 생각”이라고 분석했다.
해묵은 골칫거리인 난민 문제에 군대를 동원할 수도 있다. 그리스의 유럽의회 의원인 에바 카일리는 스푸트니크에 “유럽의 경계에 있는 그리스와 이탈리아는 터키를 통해 밀려드는 난민의 위협에 노출돼 있다”며 “하지만 터키가 나토 회원국이어서 제대로 대응할 수가 없다”고 호소했다. 당사자인 터키의 반대로 나토에 손을 벌릴 수 없다는 주장이다. 반면 유럽군은 EU가 주도한다. EU 가입이 번번이 좌절된 터키는 끼어들 여지가 없다.
유럽군은 지난해 12월 유럽안보ㆍ국방협력체제(PESCO) 출범으로 공동훈련과 군사작전의 틀을 갖췄다. 올해 6월부터 작동한 유럽개입이니셔티브(EII)는 현장에 실제 병력을 보낸다. 유럽방위공동체, 서유럽동맹, 신속대응군 등 그간 시도했던 독자적인 안보구상이 나토의 위세에 눌려 무산되거나 명맥을 유지하는 데 그쳤지만, 비로소 흑역사에서 벗어날 발판을 마련한 셈이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해외 파병은 물론이고 전투에 자국 병력을 투입하는 과정에서 25개 EU 회원국 의회의 승인을 받으려다간 타이밍을 놓치기 십상이다. 유럽군이 표방한 신속대응과는 거리가 멀다. 비용도 부담이다. 프랑스와 독일조차 나토 분담금 액수가 기준인 국내총생산(GDP)의 2%에 못 미쳐 가뜩이나 미국의 비아냥을 자초하는 상황이다. 새로 군대를 만들 경우 재원을 어떻게 마련할지 의문이다.
특히 유럽 안보를 주도해온 나토와의 관계 설정은 최대 걸림돌이다. 북유럽의 노르딕북방협력기구(NORDEFCO)나 독일-네덜란드 간 국방협력을 제외하면 나토 울타리 밖에서 미국을 제쳐놓고 유럽의 군사력을 검증할 기회가 흔치 않았다. 독일과 프랑스는 1989년 연합여단을 결성했지만 2015년에서야 아프리카 말리에 처음 투입됐고, 아프가니스탄에서 양국은 각자 감당할 위험부담 수위를 놓고 옥신각신하며 허송세월했다. 그렇다고 나토가 군사작전을 주도한다면 유럽군의 존재감은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유럽군 창설은 정치적 수사에 불과하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한 유럽’을 표방한 마크롱 대통령이나 경쟁국 프랑스의 주도권을 견제하려는 메르켈 총리의 입맛에 꼭 들어맞기 때문이다. 폭스뉴스는 “마크롱의 구상은 아직 모호한데다 트럼프의 거센 반발에 직면해 있다”며 “메르켈은 과거 독일 군대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고 프랑스 못지 않게 대외 정책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기회”라고 평가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