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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가을 나들이

입력
2018.11.15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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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들이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제게는 봄 소풍을 간다는 말보다 왠지 따듯합니다. 소풍과 달리 순 우리말이라 그런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봄나들이와 달리 가을 나들이는 생소한 듯합니다. 아마 단풍 구경이나 단풍놀이가 더 일반적인 말이기 때문 아닐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 단풍놀이가 아닌, 가을 나들이에 의미 부여를 해봤습니다.

가을 나들이는 단풍놀이나 단풍 구경보다 더 종합적이고 관조적입니다. 단풍놀이가 비교적 색의 향연을 즐기는 데 초점이 있다면 가을 나들이는 울긋불긋 나뭇잎만 보는 게 아니라 노랗게 익어가는 벼도 보고 열매도 보며, 색깔만 보지 않고 잎이 떨어지는 것도 보지요. 그리고 색의 아름다움을 넘어 소멸의 아름다움도 보고, 또 시간도 보고 인생도 봅니다.

제가 미국에 잠깐 있을 때 자전거로 통학을 했습니다. 차 살 돈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공원길로 학교를 다니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찻길로 가면 15분이면 갈 수 있는 곳을 자전거로 45분이 걸리는 공원길로 부러 돌아서 갔습니다. 공원길을 자전거로 오가며 저는 부족한 운동도 하고 무엇보다 말 못 하는 데서 오는 스트레스를 풀었던 겁니다. 그렇게 통학을 하다 요즘 같은 늦가을이 됐습니다. 단풍이 절정일 때 그 절정의 아름다움에 제 마음이 물드는 것을 느꼈습니다. 교실에서는 마음이 우울했는데 단풍을 보니 아름다움에 제 마음이 물드는 겁니다. 그때 느꼈습니다. 단풍을 보는 것은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 아니라 물드는 것이라는 것을. 마찬가지로 아름다움도 그저 보기만 하는 게 아니라 물들어야 하고 닮아야 하는 거라는 것을.

아무튼 며칠 그렇게 단풍을 감상하고 즐기며 통학했는데 비가 온 다음날 공원길에 들어서니 아름답던 이파리들이 다 떨어져 바닥에 쑤셔 박혀 있고, 어떤 이파리들은 물기 먹은 아스팔트에 짝 달라붙어 마치 포박돼 있는 것 같았습니다. 낙엽이 뒹굴기라도 하면 좋을 텐데 말입니다. 순간 제 입에서 ‘빌어먹을 놈의 비바람이 이 짓을 했지!’라는 말이 나왔고, 그렇게 한참을 빌어먹을 비바람에 분노하며 씩씩대며 갔지요. 그런데 문득 제 생각과 제 눈이 비바람에서 가을로 옮겨가며, 비바람이 이파리를 떨어뜨린 것이 아니라 떨어질 때가 되어서 떨어진 것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렇지요. 비바람이 조금 일찍 이파리를 떨어지게 했는지는 모르지만 실은 때가 되어 떨어진 것이고, 나무가 때에 순종하여 이파리를 떨군 거지요.

이렇게 인생에는 때가 있는 겁니다. 꽃이 피면 질 때가 있고, 이파리가 돋아나면 떨어질 때가 있으며, 날 때가 있으면 죽을 때가 있습니다. 나무들은 이때에 잘 순종하여 떨어진 것이고, 떨어지기 전까지 소멸의 아름다움을 우리에게 선사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 소멸의 아름다움 앞에서 아름다움만 보고 감탄한 것인데 실은 소멸도 봐야지요. 노을의 아름다움도 그렇지만 단풍의 아름다움은 소멸의 아름다움이고, 그러기에 우리도 단풍처럼 아름답게 소멸하라고 단풍은 우리 마음을 물들이는 것입니다. 소멸의 아름다움은 순종의 아름다움인 것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늙어서도 욕심을 놓지 못하면 얼마나 추합니까? 노추(老醜)는 겉모습이 추해서 추한 것이 아니라 생로병사의 인생을 넉넉하게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젊었을 때를 생각하며 늙는 것에 분노하고, 건강했을 때를 생각하기에 병으로 인한 통증을 넘어 삶이 너무 고통스럽고 불행하기까지 하면 그것이 추한 겁니다. 그러니 인생의 때를 잘 받아들이고 순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 이렇게 순종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안에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팽팽한 피부만 사랑치 않고 주름진 자기를 사랑할 수 있는 그런 사랑, 몸은 소멸되어도 죽지 않을 정신과 영혼이 있어 사랑하는 그런 사랑이 있으면 아름다울 것입니다.

김찬선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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