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진 지 열흘이 지났다. 대배우의 가는 길에 미디어의 예우는 각별했다. 거의 모든 신문이 1면에 그의 부음을 알리고 특집면을 헌정했다. 유독 대중문화예술에만 점잔을 빼던 전통 언론이 이번에는 인색하지 않았다. 배우든 가수든 그만큼 언론의 꽃상여를 타고 떠난 이는 없었다.
한 시대 표상의 장례를 애도하며 지켜봤다. 그에 대한 대중과 언론의 관심은 배우 신성일과 인간 신성일 양쪽에 다 걸쳐 있다. 어느 신문의 제목처럼 그에겐 영화가 인생이었고 인생이 영화였으니까. 그리고 그 둘은 아내이자 동지인 엄앵란과 떼어 놓을 수 없다. 많은 보도가 쏟아졌다. 그중 나를 생각에 잠기게 한 건 좀 엉뚱한 것이었다. 그가 딸에게 남겼다는 유언. “엄마한테 가서 참 수고했고, 고맙다 그래라. 미안하다 그래라.”
수고…고맙…미안…. 이 세 단어가 이상하게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다운 로맨틱한 유언이라고 제목을 단 보도가 많았다. 로맨틱? 글쎄다. 그가 영화에 바친 열정을 높이 평가하고, 한 개인으로서 자유로운 연애정신을 가진 남자라는 건 인정하지만 경우가 다른 것 같다. 어디선가 많이 듣던 말이다. 그의 유언에서 묻어나는 건 로맨티시즘이 아니고, 그도 그 시대의 한국 남자였구나라는 연민이다. 유언에서조차도 부부는 평등하지 않다. 수고하고 고맙고 미안한 게 무언지 생략했지만 다 안다. 살림하느라 수고했고, 혼자 아이들 키우느라 고생했고, 바깥으로만 싸돌아다니며 이런저런 일로 속을 썩여도 남편이랍시고 늘 기다려줘서 고마웠다….
나만의 별난 느낌일까. 나는 ‘수고’ ‘고맙’ ‘미안’에서 전통적 가부장 시대를 살아온 한국 남편들이 배우자에게 지닌 공통적인 감정의 결을 읽는다. 그건 (대체로) 한국 남자들이 원죄처럼 갖고 있는, 반려자에 대해 빚진 감정이다. 하늘처럼 우러름을 받다가 늙어 힘이 빠져 죽음의 사자가 문지방을 건너올 때 비로소 그 고해성사를 한다. 우리의 많은 아버지, 할아버지들이 “임자, 고생만 시켜 미안했소”하며 눈을 감았다. 유언은 이 세상에서 가장 진솔한 언어다. 그래서 가슴이 아프고 만감이 교차한다.
이 부부의 스토리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알 만큼 다 안다. 둘은 긴 세월 사랑보다는 동지애에 가까웠다. 사람들은 상주를 주시했다. 소복 차림의 그녀는 의연했다. 그리고 솔직했다. 에둘러 말하지도 않았고 굳이 부정하지도 않았다. 눈물을 보이지도 않았다. 저승에 가서 순두부 같은 여자 만나서 구름 타고 놀러다니라 할 때는 짠했다. 그녀는 남편은 ‘집 안의 남자’가 아니라 ‘대문 밖의 남자’ ‘사회적인 남자’라고 표현했다. 하지만 영화밖에 모르는 남자여서 존경할 만해 55년을 살았다고 했다. 이 말로 그의 유언을 받아준 것일까.
평생 대문 밖에 있던 남자. 그 남자의 아내는 올해 초 한 방송에서 “신성일은 내가 책임져야 할 큰아들”이라고 말했다. 다 큰 아들을 데리고 산다는 엄마들을 주변에서 많이 본다. 아들 같은 남편이란 물가에 내놓은 아이 같지만 버릴 수는 없다는 뜻일 게다. 대책이 없어서 그냥 받아주고 희생하고 용서한 것이다. 왜 아직도 한국 가정의 마초들은 정작 아내에게는 보살피고 책임져야 할 아들처럼 보이는 걸까. 비극적 역설이다.
세상이 바뀌었다. 부부 관계, 가정의 모습, 사회의 모럴도 달라졌다. 21세기 한국 남편들은 임종을 지키는 아내의 손을 잡고 뭐라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수고’ ‘고맙’ ‘미안’은 우리 아버지들의 고해성사만으로 충분하다. 수고시키지 않고 미안할 일 안 하면 된다. 고마운 건 같이 고마운 거다. “당신을 사랑했고 사랑하오. 당신과 평생 함께해서 행복했소. 내가 잘못한 게 있다면 용서해주오.” 이게 로맨틱한 유언이 아닐까.
한기봉 언론중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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