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최고의 단풍놀이터, 도치기현 닛코
도쿄에서 북쪽으로 130㎞ 정도 떨어진, 기차로 2시간 정도 달려야 나오는 도치기현의 작은 도시 닛코(日光). 일본 여행이라면 대개 오키나와, 홋카이도, 오사카, 교토 그게 아니라면 제주 가듯 오가는 후쿠오카 정도를 꼽는다. 도쿄라면 도심지 관광 아니면 온천을 즐길 수 있는 1시간 거리의 하코네다. 닛코란 이름을 들어봤다면 아마 스키장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닛코는 일본 최고의 단풍놀이터다. 단풍이 아름답기도 하지만 늘 그렇듯 여행은 ‘어디서 무엇을’ 보다 ‘누구와 어떻게’가 더 중요하다. 닛코는 일본 역사가 어린, 우리로 치자면 경주 같은 곳이다. 학창 시절 소풍으로, 수학여행으로 닛코를 찾는다. 곳곳에서 학생 단체 관람객이 넘쳐난다. 여기다 단풍처럼 추억에 젖은 어른들까지 몰려들면, 닛코의 도로는 마비된다.
◇간토 평야의 수호자, 도쿠가와 이에야스
도쿄에서 닛코까지, 도쿄역 부근이라면 JR가 있다. 아사쿠사, 신주쿠에선 도부(東武)철도를 탈 수 있다. 도부철도는 하나투어 등 국내 여행사를 통해 닛코 관광지 패스권을 판매하는데, 미리 사두면 전망대, 유람선 등을 모두 이용할 수 있다.
닛코는 도쿄에서 멀어진 뒤 처음 산다운 산이 나오는 곳이다. 기차로 2시간 가는 동안 차창 밖으로 보이는 건 오직 평야다. ‘일본 최대’라는 간토 평야는 서울ㆍ인천ㆍ경기도를 합한 것보다 넓다. 이 넓은 땅에서 높은 곳이라야 해발 200m라 한다.
더 자세히 봐야 할 건 평야 사이 수로다. 알려졌다시피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무 연고도 없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이곳으로 보냈다. 당시 도쿄는 바닷가 인근 습지로 버려진 땅이었다. 눈에 거슬리는 도쿠가와를 견제한 것이다. 한마디로 제대로 물 먹은 셈인데, 도쿠가와는 오히려 이 일대를 열심히 개척해 역전의 발판으로 삼았다.
심훈 한림대 교수는 ‘역지사지 일본’(한울)에서 임진왜란 이후 40년 뒤인 병자호란 때 조선의 정규군이 3만5,000명 수준이었는데, 임진왜란 이후 불과 2년 뒤에 벌어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도쿠가와가 동원한 병력이 10만명에 달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지극히 한국적인 민족감정을 내세워 ‘우리는 평화를 사랑하는 백의민족이요 일본은 잔혹한 사무라이 나라라서 그렇다’라고 깎아 내려도 된다. 하지만 7년간의 침략전쟁 직후에도 10만 병력을 동원할 수 있다는 것만큼 간토 평야의 생산력을 잘 보여 주는 건 없다.
도쿠가와는 자신의 무덤이 간토 평야를 내려다보는 곳에 만들어지길 원했다. 일설에 따르면 풍수 보는 이들이 말렸으나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한다. 도쿠가와 아들이 신사와 무덤을 조성했고, 손자가 전국에서 일꾼과 금을 끌어 모아 지금처럼 화려하게 꾸몄다. 199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닛코 도쇼구(東照宮)다.
◇조선통신사가 찾은 도쇼구
도쇼구 입구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거대한 삼나무다. 일본 자생송인 이 나무는 곧고 굵고 습기에 강해 일본 목조 건물 대형화를 뒷받침했다. 일본 전역에서 온 학생과 단체관람객, 서양의 역사문화 탐방객이 뒤엉켜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단연 요메이몬(陽名門)이 화려하게 빛난다. 현란한 금박에다 무려 5,000여개에 이르는 온갖 종류의 조각을 다 새겨 넣었다.
심플함을 강조하는 요즘 감성으로 보자면 지나치게 오버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별다른 구경거리가 없었을 그 시절엔 대단한 눈요깃거리였음에 틀림없다. ‘문 하나만 제대로 감상하려 해도 하루가 걸린다’고 한단다. 계단 아래서 올려다보면 별들이 요메이몬을 중심으로 돌도록 되어 있다. 북극성을 등에 진, 정북(正北) 방향이란 얘기다. 영원함을 꿈꾸는 권력이란 늘 이렇다. 오래된 건물치고는 지나치게 생생하다 싶었는데, 나오는 길에 보니 보수 공사가 완료됐음을 축하하는 플래카드가 곳곳에 나부끼고 있었다. 요메이몬의 화려함을 만끽하기에 좋은 타이밍이란 얘기다.
일본의 국보급 문화재가 즐비한 도쇼구에선 조선통신사의 흔적도 찾을 수 있다. 조선통신사가 에도에 도착하면 쇼군은 닛코 방문을 권했다. 그 때 통신사 일행이 건넨 ‘조선종’이 요메이몬 앞에 걸려 있다. 뒤편, 도쿠가와 영묘 앞에도 조선통신사가 선물한 삼구족(三具足), 즉 향로ㆍ화병ㆍ촛대가 있다. 영묘로 가는 계단 길엔 “사람의 일생은 무거운 짐을 지고 먼 길을 가는 것과 같으니 서두르지 말라”는 도쿠가와의 유훈이 남아 있다. 오다 노부나가, 도요토미 히데요시와 비교되는 도쿠가와의 리더십 ‘인내와 끈기’가 떠올라 웃음이 난다.
이 외에도 세마리 원숭이로 사람의 일생을 묘사해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원숭이라는 ‘산자루(三猿)' 조각, 예민한 고양이조차 별 걱정이 없이 편안하게 잠 잘 정도로 지금 시대가 태평성대임을 강조하는 ‘네무리네코(眠り猫)’ 조각 등 스토리텔링이 풍부한 아기자기한 조각들을 만날 수 있다.
도쇼구 앞엔 오래된 카페 ‘홍구’가 있다. 여기저기 돌아보느라 출출해진 배를 채우기 좋은 곳인데, 혹 관심 있다면 가게 주인을 한번 꼬드겨 보길. 지은 지 300년이 된 가옥을 개조한 카페인데, 흥이 나면 주인이 흔쾌히 비밀의 공간을 열어 300년 된 기둥과 서까래를 보여 준다. 삼나무의 힘이다.
◇호수와 폭포 어우러진 닛코 단풍
가을 닛코는 역시 단풍이다. 온도 차가 클수록 단풍이 곱다는 점을 감안하면, 바닷가의 큰 평야가 드디어 2,000m가 넘는 산들과 맞닿는 닛코가 단풍에 딱 알맞은 곳이다 싶다. 산 깊고 물 많으니 호수, 폭포까지 어우러져 곳곳이 절경이다.
그 중 제일은 백두산보다 300m 정도 낮은 높이의 난타이(男體ㆍ2,486m)산과 해발 1,274m로 난타이산 허리춤을 두르고 있는 호수 주젠지코 일대다. 빙어를 낚으려는 배가 밀려들 정도로 물이 맑은 주젠지코는 둘레만 25㎞다. 원래 물줄기를 용암이 막으면서 생성된 호수라 한다. 단풍 구경을 위해 1시간 정도 호수를 한 바퀴 도는 유람선이 있다. 제법 쌀쌀한데도 기념 사진을 찍으러 뛰어다니는 관광객들 때문에 배가 출렁댄다. 주젠지코 아랫부분엔 폭 7m, 높이 97m에 이르는 게곤폭포(게곤노타키ㆍ華嚴の瀧)가 있다. 해발 1,373m 아케치다이라 전망대에서 원경을 감상하거나, 차를 타고 내려가 폭포 바로 아래까지 들어가 감상할 수도 있다.
평야 뒤 깊고 험준한 산이라 야생동물도 많다. 큰 뿔 달린, 어른 키보다 더 큰 사슴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무섭긴 내가 더 무서운데, 나를 발견한 순간 엉덩방아까지 찧으며 도망가는 바람에 내가 더 미안했다. 나름 진기한 경험이라 생각했는데, 실은 흔한 풍경이라 한다. 아니나 다를까 밤엔 더 많은 사슴이 돌아다녔다. 문득 여기저기 설치된 ‘곰 주의’ 경고판이 떠올라 얼른 숙소로 돌아왔다. 그러고 보니 트레킹 도중 실종된 프랑스 여행객을 찾는다는 전단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또 빠트릴 수 없는 곳은 180도 커브를 48번 겪어야 한다는 ‘이로하자카’ 코스. 버스를 타고 가도 울렁댈 지경인데, 일본 최고의 드라이브 코스로 꼽힌단다. ‘이니셜 D’ 같은 자동차 관련 만화나 영화, 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곳이다. 하지만 이로하자카 코스의 최고 승자는 자전거였다. 주젠지코를 돌아 업힐에 성공한 이들은 환희에 찬 표정이었다. 한국 자전거 여행객들이 심심찮게 찾는 곳이기도 하다.
닛코(일본)=글ㆍ사진 조태성기자 amorfat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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