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속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종종 인내심을 잃는다. 인터넷 속도가 조금만 느려도 울화통이 터지고, 내비게이션이 버벅거리면 길을 잃을까 봐 불안해진다. ARS(전화자동응답시스템) 상담원 연결을 기다리는 몇 초도 참지 못해서 도중에 툭 끊어버린 경험 한두 번쯤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일상의 많은 부분을 스마트폰에 의지하게 되면서 ‘디지털 치매증후군’도 나타났다. 최첨단 기술이 생활을 편리하고 윤택하게 해 줬지만, 그 편리함이 도리어 걱정과 불안, 분노, 기억력 감퇴를 유발하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현대 사회의 아이러니다.
하지만 여전히 2G 휴대폰 사용자가 존재하듯 자신만의 속도로 디지털 사회를 유영하는 이들도 있다. 스마트폰으로 안 되는 게 없는 시대에 안 되는 게 많은 블랙베리 스마트폰을 찾는 사람들처럼 말이다. 그들은 말한다. “당신에겐 불편해 보일지 몰라도 우리는 전혀 불편하지 않다. 오히려 그 불편이 즐겁다.” 블랙베리 마니아로 알려진 배우 지진희도 가입한 국내 최대 블랙베리 카페 회원들을 만나 ‘불편함의 미덕’에 대해 들었다. 카페 운영진인 강승호(37ㆍ의료기기연구원)씨와 강정목(36ㆍ 보험설계사)씨, 정다인(27ㆍ사회복지사)씨, 이현일(25ㆍ유통업)씨는 그간 모아둔 여러 기종을 가져와 진귀한 구경도 시켜줬다.
불편함을 불식시킨 집단지성의 힘
S사와 A사가 양분한 스마트폰 시장에서 블랙베리는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꿋꿋이 지조를 지킨 마니아들 덕분이다. 현재 블랙베리 사용자는 6만5,000명에서 7만명(블랙베리모바일코리아 추산) 수준. 국내 스마트폰 사용자(5,000만명) 중 0.14%에 불과하다. 때문에 갈라파고스 군도에 고립된 ‘별종’ 취급을 받기도 한다. “주변 반응이 늘 똑같아요. ‘이 불편한 걸 왜 쓰냐’는 거죠. 블랙베리만의 매력을 설명해도 잘 이해하지 못해요.” 정다인씨의 얘기에 모두가 맞장구를 쳤다.
블랙베리의 독창적인 디자인은 중독성이 강하다. 한번 발 디디면 헤어나오기 어렵다. 정다인씨와 이현일씨는 “차별화된 디자인으로 나만의 개성을 드러낼 수 있어 블랙베리를 선택했다”며 “블베병(블랙베리 중독증세)엔 블랙베리를 사용하는 것밖에 치료법이 없다”고 입을 모았다. 강정목씨와 강승호씨는 블랙베리 초창기부터 10년 가까이 사용한 골수 팬이다. 지금까지 23가지 기종을 사용해 봤다는 강정목씨는 “디자인에 반해 선택했는데 여태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며 “그래서 살림살이가 쪼들리는 모양”이라고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블랙베리를 기어코 백악관에 들인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에게 영향을 받았다”는 강승호씨는 직접 써 본 10가지 기종 중에서 ‘오바마폰’으로 알려진 블랙베리9000 모델을 ‘최고’로 친다.
치열한 속도전이 펼쳐지는 스마트폰 시장에서 도태된 블랙베리는 2010년 한국에서 사업을 철수했다. 지원군을 잃은 사용자들은 블랙베리와 이별하는 대신 자구책을 찾았다. 해외 자료를 번역해 카페에 올리고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면서 집단지성을 발휘했다. 기종별 장단점 같은 기초적인 정보부터 각종 기능 설정 방법, 프로그램 오류 해결 방법 등 실전 매뉴얼이 차곡차곡 쌓이고 수시로 업데이트됐다. 3만명이던 카페 회원은 19만명까지 늘어났다. 회원들 간 유대감도 더 끈끈해졌다.
이들은 “블랙베리만의 장점은 이 모든 수고를 할 가치가 있다”고 입을 모았다.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는 키보드의 ‘손맛’은 정말 최고예요. 오타가 안 난다니까요. 키보드 때문에 다시 블랙베리로 돌아오는 분들도 많습니다.”(강승호씨) “보안도 뛰어나죠. 본사에서 해킹을 하면 상금을 주겠다고 했는데 아직까지 성공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어요. 또 대부분 블랙베리 사용법을 모르기 때문에 비밀번호를 설정하지 않아도 저절로 보안이 돼요.”(이현일씨) 이들은 ‘홍익인간’ 정신도 실천하고 있다. 부품부터 액세서리까지 모두 해외에서 들여와야 하기 때문에 한꺼번에 대량 구매해 다른 사용자들과 나눈다.
‘예쁜 쓰레기’엔 불편함의 미덕이…
그래도 블랙베리는 스마트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스마트폰이다. 디자인은 예쁘지만 성능이 뒷받침되지 않아 ‘예쁜 쓰레기’라는 오명이 따라다닌다. 최근 출시된 키원과 키투 기종은 안드로이드를 탑재해 다른 스마트폰처럼 다양한 앱을 구동할 수 있지만, 이전 기종은 인터넷뱅킹과 게임 같은 건 꿈도 못 꾼다. 몇몇 기종에선 카카오톡 메신저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도 쓸 수 없다. 인터넷도 느리다. 하지만 블랙베리의 진짜 미덕은 이런 불편함에 있다. “블랙베리를 일컬어 수험생용 휴대폰이라고 하잖아요. 실제로 고3 학생들과 고시생들이 많이 써요. 활용할 수 있는 앱이 별로 없으니까 휴대폰 사용 시간이 확 줄거든요. 그만큼 여유로워져요. SNS 중독에서도 벗어날 수 있답니다.”(정다인씨)
불편함까지 장점으로 승화하는 내공으로도 감내하기 어려운 단점이 있을까. 돌아온 답변도 결국엔 “불편함이 없다”로 귀결되는 ‘예찬론’이다. “키보드가 방수에 취약하다는 점 정도랄까요. 방수가 안 돼도 자가 수리가 가능하니까 괜찮아요. 블랙베리 사용자라면 자잘한 고장쯤은 스스로 고칠 줄 알죠.”(강승호씨) “그동안 해외에서 구매해야 해서 배송이 한 달 넘게 걸렸어요. 하지만 지난해 블랙베리사가 한국에 다시 들어오면서 이제는 유일한 불편함마저 사라졌어요.”(강정목씨)
휴대폰조차 S사와 A사 말고는 선택지가 없는 획일화된 한국 사회에서 이들이 유일하게 바라는 건 “서로 다른 취향을 드러낼 자유”다. “솔직히 불편함을 따지자면 하나부터 열까지 안 불편한 게 없어요. 그러나 그 불편함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과정 자체가 저희에겐 즐거움이에요. 편견 어린 시선에 저희를 가두지 않았으면 좋겠어요.”(이현일씨) “내 취향을 존중받기 위해 타인의 취향을 배려하는 것이 진정한 개인주의라고 생각해요.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집단주의가 진정한 ‘불편’ 아닐까요. 블랙베리도 따지고 보면 그저 기성품일 뿐이에요.”(강정목씨)
불편은 성장과 변화를 이끈다
블랙베리 사용자들의 IT 지식은 웬만한 전문가 못지않다. 지식과 경험이 쌓이면서 관심도 넓어져 다른 휴대폰 회사의 최신 기종을 블랙베리와 동시에 사용하는 ‘얼리 어답터’도 많다. 주변 지인들은 스마트폰 사용에 문제가 생기면 AS센터보다 이들을 먼저 찾아온다고 한다. 강승호씨는 “블랙베리를 쓸 줄 알면 못 다룰 스마트폰이 없다”고 자부했다. 불편함이 도리어 적응력과 유연성, 전문성을 길러준 셈이다.
이처럼 불편은 생산적으로 활용될 수 있다. 범상규 건국대 경영학과 교수는 책 ‘멍청한 소비자들’에서 “편안함을 추구하는 인간의 본성은 불편을 제거함으로써 생존 본능을 높이려는 의도의 반영이지만, 때로 불편함은 인간의 생존 본능을 일깨우는 역할을 한다”고 진단했다. 도보여행과 캠핑처럼 불편한 여행이 유행하는 이유도 비슷한 맥락이다. ‘편리함의 배신’의 저자 마크 쉔과 크리스틴 로버그는 “우리가 성장하고 적응하고 더 나은 변화를 일구기 위해서는 어느 수준의 불편이 반드시 필요하다”며 “불편은 우리가 해결해야 할 삶의 문제, 바꾸어야 할 행동 방식, 달성해야 할 목표 등을 향해 우리가 각성하고 일어날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짚었다. 단, 불편 자체가 아닌 불편을 관리하는 능력이 중요하다.
때로 비즈니스 세계에서 불편은 전략이 된다. 세계적인 가구 기업 이케아의 성공 비결로 ‘고객에게 불편을 주는’ 사업 방식이 꼽힌다. 고객이 가구를 직접 운반해 조립해야 하는 불편함이 결실에 대한 자긍심으로 이어져 완제품을 사는 것보다 더 높은 만족감을 얻게 되는 ‘인지적 편향 현상’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마이클 노튼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교수는 이를 ‘이케아 효과’라고 정의했다. 블랙베리 사용자들이 제품의 결함을 보완하고자 스스로 정보를 모으면서 애정이 깊어진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즐거움을 안기는 불편의 핵심은 누군가의 강요가 아닌 자신의 필요에 따른 자발적 선택이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블랙베리 사용자들도 그 점을 거듭 강조했다. “디자인이 예쁘다거나 남들과 달라 보인다는 이유로 무턱대고 구입하지는 마세요. 카페에도 추천할 만하냐고 묻는 글들이 종종 올라오는데 그때마다 저희는 ‘다른 회사 제품을 쓰라’거나 ‘심사숙고하라’면서 뜯어말립니다. 각자 느끼는 매력은 강요할 수도, 추천할 수도 없는 것이니까요.”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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