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살만 왕세자로 후계 굳어지며
쫓겨나거나 숙청됐던 왕자들 복귀
카슈끄지 살해ㆍ예멘 공습 등 악재
빈살만 단점 보완 나선 듯
“두려움이 밀려온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
사우디 왕실 관계자는 지난달 30일 이렇게 말했다. 수년간의 영국 망명생활을 접고 우여곡절 끝에 귀국한 아흐마드 빈압둘아지즈를 맞이하는 자리였다. 왕실과 정부 고위관계자들이 대거 공항으로 마중 나가 성대한 환영식도 열었다. 내무부 장관을 지낸 그는 살만 국왕의 친동생이자 사우디 실권자 무함마드 빈살만 왕세자의 삼촌이다. 2015년 빈살만으로 후계구도가 굳어지는 과정에서 극구 반대하다 신변에 위협을 느껴 해외를 떠돌았다. 서슬 퍼런 권력의 칼날을 피해 다니는데 급급하던 과거 처지를 감안하면 딴판으로 달라진 광경이다.
사우디 왕자들이 뭉치고 있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서 다투던 경쟁자였다가 빈살만 1인 천하에 밀려 쫓겨나거나 숙청돼 응어리진 왕자들이 일단 핏줄을 앞세워 속속 모여들고 있다. 반체제 언론인 카슈끄지 살해와 예멘 공습 등 잇단 악재로 사우디가 국제사회의 이단아로 몰리며 위기가 고조되는 탓이다.
‘사우디의 워런 버핏’으로 불리는 억만장자 알왈리드 빈탈랄 왕자가 선봉에 섰다. 빈탈랄은 살만 국왕 이복형의 아들로, 빈살만 왕세자와는 사촌지간이다. 그가 소유한 킹덤홀딩스는 시티그룹, 트위터를 비롯해 전세계 주요 기업의 대주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살만 국왕이나 빈살만 왕세자보다 사우디를 대표해 국제사회에 더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빈탈랄은 지난해 11월 부패혐의로 구금됐다가 올 1월에야 풀려났다. 빈살만 왕세자가 권력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희생양으로 삼은 셈이다. 하지만 원한을 접고 ‘빈살만 구하기’에 누구보다 적극적이다.
그는 지난달 사우디가 의욕적으로 주최한 ‘미래투자 이니셔티브 컨퍼런스’ 당시 서른 살 어린 빈살만 왕세자를 근접 수행하며 해외 투자자와 정부 관료들을 맞이했다. 프랑스 기업으로부터 3억달러(약 3,400억원) 투자를 유지했고, 다른 서구업체에는 5억달러(약 5,600억원) 투자를 성사시키는 성과도 거뒀다. 카슈끄지 사건에 반발해 미국과 유럽의 상당수 국가들이 등을 돌렸지만 빈탈랄의 활약으로 체면치레는 할 수 있었다.
아울러 여성운전 허용, 해외투자 개방 등 빈살만 왕세자가 추진하는 달라진 정책 기조를 적극 지지하며 사우디 정권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1일(현지시간) “빈탈랄의 사무실 책상에는 나란히 서서 웃으며 찍은 빈살만 왕세자와의 최근 사진이 놓여 있다”며 “긴장감이 감도는 미국, 프랑스 등 서구 강국과의 관계를 재설정하는데도 역할을 다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찬가지로 부패 단속을 비판하다 체포된 살만 국왕의 조카이자 알왈리드 빈탈랄의 형제인 칼라드 빈탈랄 왕자도 최근 석방됐다고 BBC는 앞서 4일 전했다.
물론 물보다 피가 진하더라도 형제들의 잇단 등장은 빈살만 왕세자의 권력이 취약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외교정책 결정과정에서 드러난 빈살만의 무모하고 과격한 성격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국가들이 가장 우려하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WSJ은 “향후 50년간 통치를 염두에 둔 빈살만의 권력이 워낙 공고해 그가 물러날 가능성은 전혀 없다”면서 “다만 왕자들이 복귀할수록 빈살만 주변 측근들이 과거 인사들로 교체돼 잡음이 생길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분석했다.
김광수 기자 rolling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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