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내부 우파 내셔널리즘 겹쳐
메르켈ㆍ구테흐스도 우회적 비판
트럼프, 반응 없는 어두운 표정
11일(현지시간)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식에 참석하기 위해 80여명의 각국 정상과 국제기구 지도자들은 빗속에서 샹젤리제 거리를 함께 걸어 행사장인 개선문에 도착했다. 1ㆍ2차 세계 대전 후 미국 주도로 구축된 세계 질서에 대한 국제적 연대를 보여주기 위한 정상들의 행진이었다.
하지만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이 행진에 참여하지 않고 별도의 차량을 타고 와 따로 행사장에 입장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역시 따로 이동해 가장 늦게 행사장에 나타났다. 백악관은 경호상의 이유라고 밝혔으나 이 장면이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과 유럽의 분열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현지 언론들은 전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행진 뒤 진행된 기념식 연설에서 “낡은 망령들이 혼돈과 죽음의 씨앗을 뿌리려고 되살아나고 있다”며 “역사는 때로는 조상들이 피로 맺은 평화의 유산을 뒤엎고 비극적인 패턴을 반복하려고 한다”고 경고했다. 그가 지칭한 낡은 망령은 1, 2차 세계 대전을 초래한 내셔널리즘으로, 현 국제 정세가 그 당시 세계 대전 전의 혼란상과 유사하다는 우려를 담은 것이다.
그는 특히 “내셔널리즘은 애국주의의 정반대”라며 “내셔널리즘은 ‘우리의 이익이 우선이다. 누가 다른 사람을 신경 쓰나?’라고 말하고 있는 점에서 애국주의의 배신”이라고 비판 수위를 높였다. 트럼프 대통령을 특정하지만 않았을 뿐, 그를 정면으로 겨냥한 것에 다름없었다.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 트럼프 대통령은 최근 스스로를 내셔널리스트로 규정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마크롱 대통령의 연설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어두운 표정만 지었다.
이날 오후 라빌레트 전시관에서 열린 파리 평화포럼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성토는 이어졌다.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는 연설에서 “1차 대전은 고립주의가 얼마나 파괴적인지 우리에게 보여준다”고 우려했고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도 무역전쟁을 둘러싼 긴장 고조를 거론하며 “타협이라는 민주주의 정신의 약화와 규범에 대한 무시는 다원주의에 대한 두 개의 독극물"이라며 미국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평화포럼에는 아예 참석하지 않고, 기념식 행사 후 쉬렌 미군 묘지를 참배한 뒤 곧바로 귀국길에 올랐다.
마크롱 대통령과 메르켈 총리는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 국제 연대의 중요성을 강조했으나, 두 지도자 모두 유럽에서도 커지고 있는 우파 내셔널리즘 세력의 도전을 받고 있다. 반이민과 주권 강화 등을 내세우고 있는 유럽 내셔널리스트들의 모델이 다름 아닌 트럼프 대통령이다. 브루스 젠트레슨 듀크대 교수는 뉴욕타임스(NYT)에 “트럼프 대통령이 고립된 게 아니다. 유럽의 내셔널리스트 정치인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선례를 통해 수혜를 입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 대통령을 겨냥한 성토는 유럽연합(EU)이 직면하고 있는 위기를 반영하고 있는 셈이다. NYT는 “오늘날의 세계 질서를 뒷받침하는 연대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행사가 오히려 세계를 갈라놓고 있는 분열상을 전시했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새로운 국제 질서를 추구하면서 초래된 긴장을 압축했다”고 지적했고, 미 시사지 애틀랜틱도 “새로운 시대의 시작보다는 한 시대를 마감하는 스냅사진과 같았다”고 평했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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