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범람 속 저널리즘 위축된 시대
사건 아닌 맥락 좇아 깊고 넓게 봐야
낡은 관행에 안주해선 미래 더 암울
광장과 거리에서 보낸 날들이 더 많았을 대학 시절을 거쳐 기자가 되기로 했을 때 꿈은 소박했다. 같은 공채여도 여자에겐 유니폼과 커피 심부름이 당연시되던 ‘그냥 회사원’으로 살긴 두려웠고, 격동의 현장 가까이에 있으며 조금이나마 사회에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었다. 그 바람조차 이루기 버거웠다. 뛰어난 특종 기자로 성장하기엔 내가 너무 무능하고 게을렀고, 이 바닥과 조직의 문화도 너무 낡고 단단했다. ‘단독’을 곧잘 물어오는 동료, 소위 ‘야마’ 잘 잡은 기사를 써내던 후배 앞에서 “기사를 쓰랬더니 논문을 썼냐?”는 불호령과 함께 구겨진 원고지와 영혼이 통째로 쓰레기통에 처박히던 날들. 꿈은 더 소박해졌다. ‘열 번 물을 먹더라도 한 건의 정확한 기사를 쓰자.’ 당시 경찰서 형사계에 붙어 있던 표어(‘열 명의 범죄자를 놓치더라도 한 명의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지 말자’)를 변주한 것이다.
한때는 사실확인에 더해 객관성, 공정성 같은 고전적 저널리즘 원칙을 지키려 애썼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나는 좋은 기자 되기에 실패했다. 그 실패는 예견된 것이었다. 저널리즘이 흩어진 사실의 조각들을 모아 진위를 가리는 데 그치지 않고 맥락을 좇고 통찰을 더해 진실을 찾는 과정이라면, 나는 자주 산 중턱에 멈춰 섰다 발길을 돌렸다.
“뉴스의 미래는 안전한 것 같다. 암울한 것은 저널리즘의 미래다.” 언론의 사실보도 집착에 대해 “바보야, 문제는 관점이고 맥락이야!”라고 외쳐 온 미첼 스티븐스 뉴욕대 교수가 저서 ‘비욘드 뉴스’에서 내린 진단이다. 우리보다는 윗길인 선진국 언론에서도 그가 주창한 ‘지혜의 저널리즘’이나 해법 제시에 무게를 실은 ‘솔루션 저널리즘’ 같은 대안들이 활발히 논의되고 거짓정보의 범람 속에 언론의 기본인 ‘팩트체크’의 중요성이 새삼 강조되는 걸 보면, 관성에 갇힌 저널리즘을 새로 정의하고 미래를 모색해야 할 때인 것만은 분명하다.
한국언론의 미래는 더 암울하다. 작지만 강한 대안 매체와 일부 방송사가 탐사보도의 길을 넓히고 있지만, 대다수 언론은 여전히 대기업 광고와 포털의 뉴스독점 굴레에 갇혀 ‘더 많이, 더 빨리’ 받아 쓰고 베껴 쓴 기사들로 트래픽 올리기에 급급하다. 기사의 질이 문제라면서 몇몇 실험적 시도 외에 일상적으로 쏟아내는 기사들에선 사실확인의 수고를 더하고 맥락을 입히고 읽기 좋고 보기 좋게 포장해 가치를 높이려는 노력을 등한시한다.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공저자인 톰 로젠스틸은 최근 한국언론진흥재단 주최 컨퍼런스 기조발표에서 “‘나를 믿어라(Trust me)’ 시대에서 ‘내게 보여달라(Show me)’ 시대로 바뀌었다”고 말했다. 과거 언론이 ‘게이트키퍼’로서 시민이 알아야 할 정보를 걸러 보여줬다면, 이제는 이 기사가 왜 중요한지, 출처가 어딘지, 어떻게 검증했는지 등을 투명하게 밝히고 신뢰를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저널리즘 기본 원칙을 더 엄격하게 지켜야 함은 물론이다.
부실한 사실확인, 정파성 등이 한국언론의 고질로 지적돼 왔음을 상기하면, 신발끈을 고쳐 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물리학자 김상욱은 신간 ‘떨림과 울림’에서 이렇게 말했다.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에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과학 대신 저널리즘을 대입해 보자. 저널리즘의 위기는 근본적으로 우리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와 사고방식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 아닐까.
젊은 기자들이 나와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바란다. 무력한 현실에 안주해 ‘그저 그런 기자’로 살아간다면 부지불식 간 ‘나쁜 기자’로 전락할 수 있다. ‘좋은 기자’를 꿈꾸며 묻고 따지고 성찰하는 노력을 쏟아야 ‘그럭저럭 괜찮은 기자’라도 될 수 있다.
이희정 미디어전략실장 jay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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