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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 정치적 올바름과 인간의 예의

입력
2018.11.10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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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그런 말을 했다. 꼭 강남이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어떤 동네에서 데이트를 하는지가 그 사람 취향의 수준, 나아가서는 심지어 인권 의식의 수준까지 보여준다고. 그는 그렇게 사람을 걸러낸다고 했는데, 그러면서 탈락감으로 지목한 지역이 서울 강북권 최대의 중심가 중 하나였다.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고상하게 포장하긴 했지만, 그게 강남 아니면 격 떨어진다는 말이랑 무슨 차이가 있는 걸까. 우스운 것은 그가 페미니즘 등 인권 문제에 적극적으로 강한 목소리를 내는 나름대로 유명인이었다는 것이다.

문득 나의 유년기를 생각했다. 내가 살던 동네 이름은 공단이었다. 진짜 근대화 시대처럼 공장에서 숙식을 한 건 아니고, 대형 공단이 바로 옆에 있어 그런 이름이 붙었다. 우리 집을 포함해 이 동네의 아버지들은 대부분 그 공단의 공장 노동자였다. 낡은 주공아파트와 저층 다세대주택이 빼곡히 들어섰던 그 동네는, 지금은 중국 동포 등 외국인 노동자들의 보금자리가 되었다고 한다.

동네가 취향의 수준을 결정짓는다는 그의 말은 반쯤 옳다. 승강기 없고 연탄 때는, 변기는 고장 나고 온수도 안 나오는 열 평 남짓한 주공아파트에 살면서 무슨 취향이란 걸 가졌겠는가. 중학생이 돼서야 한식이 아닌 밥을 처음 먹어봤다. 3,000원이면 사는 보디클렌저가 엄마만 쓸 수 있는 고급 사치품인 줄 알았다. 돈이 좀 있었대도 딱히 취향이 나아지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 동네에서 문화시설이란 성인영화를 매일같이 걸고 있는 낡은 상가의 동시상영 영화관 정도였으니.

내 유년기가 불행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어디 자랑할 만큼 대단한 가난도 아니거니와, 그땐 그게 딱히 가난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어차피 다 같은 공단 지역에 대단한 부자가 있었던 것도 아니니, 우리들의 문화적 취향이란 참 다들 고만고만할 수밖에 없었다. 그게 나의 세상이었고, 취향의 한계선이었다.

어쩌면 동네가 인권 의식까지 결정짓는다는 그의 말도 반쯤은 옳을지 모른다. 여성, 퀴어 등 소수자 인권 문제가 새로운 사회의 화두로 부상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쉽게 받아들이지만, 어떤 사람들은 아니다. 주입된 선입견을 극복하고 다양성을 긍정하기 위해 공부가 필요할 수도 있다. 서로 다른 사람들, 다양한 삶의 양태, 낯선 문화를 접하고 또 교류해봐야 한다. 핑계일 수도 있겠지만 내가 살던 마을에선 그게 쉽지 않았다. 내 얄팍한 취향만큼이나 의식 또한 그러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설령 그의 말이 절반쯤의 진실을 담고 있다 해도, 우리는 안다. 그렇게 말하면 안 된다는 것을. 성과ㆍ성적 지향으로 사람을 구분하고 차별해서는 안 되는 것처럼, 지역, 빈부 역시 당연히 그렇다. 어떤 대단한 논리를 앞세우더라도 사람을 그리 멸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잘 안다.

그런데 어떤 문제들, 예를 들어 페미니즘이나 소수자 인권에 대해서는 강박적으로 정치적 올바름을 주장하면서 정작 이런 기본을 지키지 않는 경우를 자주 본다. 한 게임 제작자는 게임 배경과 어울리지 않는 복장의 여성 캐릭터가 게임에 등장하는 데 대해 소비자들이 항의하자 그들을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칭해 물의를 일으켰다. 워마드 같은 극단적 사례가 아니더라도, 여성, 소수자의 인권을 강조하면서 타인의 외모나 신체적 특징, 결함 등을 비웃는 사회관계망의 그 많은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아무래도 혼란스러워진다.

정치적 올바름은 다양한 소수자들을 포용하기 위해 우리가 마땅히 추구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정작 인간에 대한 예의를 잊는다면 결국 다른 나라에서 그러했듯 조롱거리로 전락할 것이다. 타인을 존중하고 늘 조심스럽게 대하는 것, 그게 결국 모든 것의 출발점이어야 한다. 어쩌면 더 나아가 그것이 소수자 인권을 위해 필요한 전부일지도 모른다.

임예인 슬로우뉴스, ㅍㅍㅅㅅ 편집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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