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로 시작했다가… 최고가 된 덕후들]
올 시즌 첼시가 영입한 사리 감독 ‘주경야축’ 9년 만에 은행일 접어
8→ 6→ 5→ 4→ 3→ 2→ 1부… 차근차근 밟아 최고 명문팀 입성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한 사람을 뜻하는 일본어 ‘오다쿠(御宅)’는 우리 사회에서도 ‘오덕후’ 라는 조어로 불려온 지 오래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성공한 덕후’, 즉 자신이 몰입해오고 즐기던 분야의 전문가로 성공한 사람을 뜻하는 ‘성덕’이라는 말도 있다. 보기에 따라 미치광이에 가깝도록 한 우물만 파다가 마침내 해당 분야의 일인자로 일어선 이들. 주연의 무대로 뛰어오른 조력자들에 뒤지지 않는 억척스러움이 빚어낸 결과이다.
◇평범한 은행원이 세계적인 축구클럽 감독으로
축구종가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의 명문팀 첼시FC(첼시)는 2018/2019 시즌을 앞두고 이탈리아 출신 마우리치오 사리를 감독으로 영입했다. 첼시는 거스 히딩크 감독을 비롯해 주제 무리뉴, 안토니오 콘테 등 세계적인 명장이 거쳐 간 곳으로, 축구 감독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지휘봉을 잡아보고 싶어하는 클럽 중 하나다. ‘꿈의 무대’의 감독으로 사리가 선임됐다는 소식에 전 세계 축구팬들은 열광했다. 사리 감독이 가지고 있는 특이한 경력 때문이다.
사리가 걸어온 길은 ‘성공한 덕후’의 전형을 보여준다. 1959년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태어난 그는 누구보다 축구를 사랑했지만 프로 선수가 되지 못하고 피렌체의 한 은행에 취직해 평범한 은행원으로 살았다. 그러나 축구를 향한 사랑은 식지 않았다. 낮에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아마추어팀(한국의 조기축구회 또는 생활형 스포츠클럽 격)에서 선수로 뛰었다.
사리는 선수 생활에 만족하지 않고 1990년 31세의 젊은 나이로 8부 리그 격인 ‘스티아’라는 작은 팀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이때부터 낮에는 은행원으로 밤에는 지역 클럽팀의 감독으로 활동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감독 경력이 쌓이면서 그가 지휘하는 팀도 ‘파엘레세’(6부 리그 격), ‘카브릴리아’(5부 리그 격) 등으로 점차 수준이 높아졌다.
그러다 1999년 사리는 ‘테골레토’라는 클럽의 지휘봉을 잡으며 은행직을 접고 전업 감독으로 뛰어들었다. 훗날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업 감독이 되기로 결심한 당일 아내에게 “무언가 이뤄내려면 감독 역할에만 집중해야 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나는 축구를 향한 열정만으로 먹고 살 각오가 되어있다”라고 자신의 생각을 전했다고 밝혔다.
이후 사리는 ‘산소비노’라는 클럽을 6부리그에서 4부리그로, 2003년에는 ‘산지오바네세’를 4부에서 3부리그로 승격시켰고, 2005년에는 세리에B(2부 리그) ‘페스카라’의 감독을 맡았다. 정통 엘리트 축구인 출신이 아닌 만큼 차근차근 지도자로서 성장계단을 밟아나간 셈이다.
2012년 마침내 ‘성덕’으로서 첫 번째 과실을 따게 됐다. 55세의 늦깎이 나이로 세리에A(1부 리그)의 ‘엠폴리FC’(엠폴리) 감독 자리에 앉았다. 환경이 개선되자 그의 ‘축구 덕후’로서의 본능은 더욱 빛을 발했다. 엠폴리 훈련장에 드론을 띄워 훈련장면을 촬영한 뒤 이후 분석자료로 활용하는 등 꼼꼼히 선수들을 지도했다. 그 결과 시모네 베르디, 다니엘레 루가니, 리카르도 사포나라 등이 사리의 지도를 받아 크게 성장했다.
사리는 2015년 이탈리아 프로축구 명문팀 ‘SSC나폴리’(나폴리)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감독에 부임했다. 나폴리 태생인 그가 어린 시절 동경했던 고향팀 감독으로 부임하게 된 것이다. 나폴리 부임 직후 사리는 기자들로부터 “세리에A에서 가장 적은 연봉을 받는 감독인데 화나지 않느냐”는 질문을 받고 “농담하지 마라. 구단은 내가 공짜로라도 일할 대가를 지불하고 있다. 나는 운이 좋은 사람이다”며 ‘성덕’의 마음가짐을 여과 없이 보여줬다.
이후 나폴리에서 3시즌간 감독 생활을 이어간 그는 2016/2017 시즌 ‘세리에A 올해의 감독’에 뽑혔고, 2017/2018 시즌 유벤투스에 시즌 말 1위를 내주며 우승에 실패했지만 시즌 중반까지 리그에서 무패를 기록하며 찬사를 받았다.
올 시즌 첼시 감독으로 부임한 직후 현지 언론에 “내 커리어에 있어 매우 흥미로운 시기가 시작됐다”며 첫 해외 리그 클럽팀 지휘봉을 잡은 것에 대해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않았다. 첼시는 9일 현재 리그에서 8승 3무로 2위를 달리고 있다. 아직 패가 없다. “첼시 팬들을 위해 흥미로운 축구를 할 것이며, 시즌 말에는 첼시에게 어울리는 우승 트로피를 획득하기 위한 경쟁을 할 수 있기를 바란다”던 그의 다짐처럼 ‘사리볼’을 탑재한 첼시는 우승을 향해 순항 중이다.
◇’드래곤볼’ 키즈가 공식 후속작 정식 작가로
1980, 1990년대 학창시절을 보낸 이들이라면 한 번쯤 접해봤을 법한 만화책이 있다. 전 세계적으로 누적 판매 부수 3억5,000만부. 일본 만화 ‘드래곤볼’이다. 혹성 베지터라 불리는 외계 행성에서 태어나 지구로 파견된 손오공의 모험을 다룬 이 만화는 1984년 연재를 시작해 1995년 단행본 기준 42권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이후 애니메이션으로만 제작된 시리즈 ‘드래곤볼 GT’(GT)는 TV로 방영됐지만 원작자인 도리야마 아키라(鳥山明)가 제작에 관여하지 않아 ‘정사’로 인정받지 못했다. 이후에도 ‘드래곤볼 환상곡’ 등 드래곤볼의 이름을 딴 숱한 작품이 나왔어도 팬들은 스토리 전개 방식과 불성실한 작화 등을 비판하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2007년 드래곤볼 팬들을 열광하게 한 새로운 시리즈가 인터넷에 등장했다. ‘드래곤볼 AF’(AF)라는 제목의 이 작품은 원작자가 아닌 무명의 작가가 그린 드래곤볼 동인지(2차 창작물)였지만 팬들은 도리야마의 화풍과 닮은 작화, 신선한 내용 전개에 환호했다. 스스로 ‘드래곤볼 오다쿠’라고 밝힌 이 작가는 당시 ‘토이블’이라는 필명으로 6년 넘게 AF를 블로그에 연재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AF 열풍을 눈여겨 본 드래곤볼 출판사 슈에이샤(集英社)는 그를 정식 작가로 채용했다. 그는 마침내 20년 만에 새롭게 시작한 드래곤볼의 공식 후속작 ‘드래곤볼 슈퍼’의 코믹스(만화책 버전) 작가로 발탁됐다. ‘드래곤볼 슈퍼’ 코믹스는 원작자 도리야마가 스토리 전개와 전체 감수를 맡고, 도요타로(토이블의 새로운 필명)가 작화를 담당하는 분업 방식으로 팬들을 만나고 있다.
만화계의 전설이라 불리는 드래곤볼 공식 후속작 작가가 됐음에도 자연인 도요타로에 대해 알려진 점은 거의 없다. 심지어 그의 본명도 알려지지 않았다. 1978년 일본 도치기현(栃木県)에서 태어나 10대와 20대 시절을 드래곤볼에 푹 빠진 만화가 지망생으로 살아왔다는 정도만 알려졌다. 실제 도요타로는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코믹콘 2017 행사에서 어린 시절 일화를 들어 자신이 드래곤볼의 광팬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초등학생 시절 가족이 친구들과 함께 생일 파티를 열어줬는데, 마침 TV에서 드래곤볼 시리즈를 방영하고 있었다”며 “파티 때문에 해당 에피소드를 제대로 시청할 수 없어 매우 화가 났다”고 밝혔다.
그는 공개석상에서 ‘성덕’이 됐다는 감격스러움을 자주 표현했다. 일본 만화잡지 ‘V점프’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는 “학창 시절 늘 드래곤볼의 조연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만화를 그려왔다”며 “드래곤볼의 공식 후속작을 연재할 거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꿈을 꾸고 있는 것 같다. 행운이 찾아왔다”고 감정을 표현했다.
도요타로는 ‘드래곤볼 슈퍼’ 코믹스 극 중반부터 단순히 작화만 담당하는 데 그치지 않고 스토리 아이디어도 내고 있다. 예를 들어 극중 조연인 ‘트랭크스’에게 회복능력이 있다는 설정 등이 그의 머리에서 나왔다. 원작자인 도리야마는 “도요타로의 아이디어를 감수하고 있는데, 계속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오길 기대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도요타로는 이미 만화계 유명인사가 됐음에도 자신의 작품에 욕심을 내기 보다 여전히 ‘드래곤볼 덕후’로서 완벽함을 꿈꾸고 있다. 그는 “한 번도 오리지널 작품을 그려본 적이 없고, 드래곤볼 스핀오프만 그렸던 작가”라며 “전투장면은 (도리야마의 그림에 비해) 아직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앞으로 (원작을 따라잡기 위해) 더 노력할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축구팬이 지상파 방송 축구 해설위원으로
‘2018 러시아 월드컵’ 경기를 시청한 축구팬이라면 BJ감스트(본명 김인직ㆍ28)를 한 번쯤 들어봤을 것이다. 평범한 ‘축구 덕후’였던 그는 2012년 아프리카TV 개인 방송에서 온라인 축구게임 ‘피파온라인’을 직접 플레이하거나 해외 축구 경기를 중계하며 축구팬과 게임팬들에 얼굴을 알렸다. 수많은 인터넷방송인 중 한 명인 그는 꾸준히 생방송으로 축구게임을 하거나 시청자들과 소통하며 중계를 하는 등 ‘축구 덕후’로서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며 인터넷 스타가 됐다. 월드컵 직전 유튜브 팔로워 60만명을 기록할 정도로 그의 인기가 높아졌다.
이를 눈여겨본 K리그 관계자들은 올 시즌을 앞두고 그를 홍보대사로 위촉했다. 그저 그런 ‘축구 덕후’가 한국 최고 프로스포츠 중 하나인 K리그의 ‘얼굴’이 된 순간이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축구팬의 한 명으로서 정말 감격스럽다”며 “인터넷 방송을 통해 K리그를 열심히 홍보하겠다”고 소감을 밝히기도 했다.
실제 그는 수원 삼성 블루윙즈 클럽하우스를 탐방해 선수들과 토크쇼를 진행하는 장면을 방송에 내보내거나 전국을 돌며 K리그 경기를 관전하고 축구선수 이근호(울산 현대)를 스튜디오로 초대해 함께 방송하는 등 홍보대사로서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감스트는 올해 열린 2018 러시아월드컵을 앞두고 ‘성덕’으로서 정점을 찍었다. MBC 디지털 해설위원으로 위촉돼 MBC의 월드컵 인터넷 중계를 도맡았다. 그가 진행한 대한민국 대 스웨덴 경기는 아프리카TV 역대 최대 동시 시청자수인 18만명을 기록했고, 멕시코전에서는 35만명을 모아 다시 기록을 깼다. 축구 중계뿐만 아니라 ‘라디오 스타’, ‘안정환과 축구 먹는 남자들’ 등 MBC 월드컵 특집 예능프로그램에도 출연, 대중에 얼굴을 알렸다. 그는 현재 MBC ‘진짜 사나이 300’, JTBC ‘랜선 라이프’ 등에 출연하며 방송인으로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개그맨 공채에 도전한 전력이 있을 정도로 방송인을 꿈꾸기도 했던 감스트는 축구와 방송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진정한 ‘성덕’이 된 셈이다.
박주희 기자 jxp938@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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