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배우 신성일씨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 송파구 서울아산병원 한 영안실에 신씨의 영정이 조화 둘러싸인 채 놓여있다.

4일 세상을 떠난 영화배우 신성일씨는 한국영화였고, 한국영화가 신씨였다. 1960~70년대가 특히나 그랬다. 당시 한국영화는 신씨가 출연한 영화, 신씨가 나오지 않는 영화 두 종류였다.

고인은 중ㆍ고교 시절 판검사를 꿈꿨던 모범생이었다. 지역 명문인 경북중ㆍ고에서 수학했다. 인생항로는 고교 2학년 시절 흔들렸다. 책방 등을 하던 어머니의 계가 깨지면서 집안은 빚더미에 앉았다. 청소년 강신영(고인의 원래 본명)은 방황했다. 고교 졸업 후 상경했다. 대학입시에 잇따라 실패한 후 돈을 벌기 위해 청계천에서 석 달 동안 호떡장사를 하기도 했다.

삶의 반전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고인의 남다른 자존심이 배우 입문을 결정했다. 충무로를 거닐다 고교 동창인 가수 손시향씨를 우연히 마주친 후 충동적으로 연기학원에 등록했다. 손씨의 성공한 모습과 남루한 자신의 행색이 자존심을 자극했다.

1959년 신필름 신인 배우 오디션을 통해 충무로에 발을 디뎠다. 오디션장에 구경 갔다가 당시 충무로를 호령하던 신상옥 감독의 동료 이형표 기술감독의 눈에 띄어 오디션을 본 후 신 감독에게 바로 발탁됐다. 신 감독은 다짜고짜 “나하고 3년 고생할래”라고 물으며 전속계약을 했다고 한다. 오디션 경쟁률은 5,098대1이었다. 한국영화계를 뒤흔들 이름 ‘신성일’은 이때 생겼다. 신 감독은 ‘뉴 스타 넘버원’이란 뜻으로 신성일(申星一)이란 예명을 고인에게 지어줬다.

신성일씨의 데뷔작 '로맨스 빠빠'(1960)

1960년 신 감독의 ‘로맨스 빠빠’로 은막에 데뷔했다. 대가족 속의 고등학생 막내아들 역할이었다. 짧게 깎은 머리에 조각도로 다듬은 듯한 얼굴이 단번에 영화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연산군’(1961) 등을 거치며 연기이력을 쌓아가던 고인은 유현목 감독의 ‘아낌없이 주련다’(1962)로 스타덤에 올랐다.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에서 밀수 일을 하는 폭력배 서두수를 연기하며 당대 청춘의 상징이 됐다. 실업이 넘치고 전쟁의 상흔을 채 못 벗은 시기, 불우한 사회계층을 대변하는 인물이었다. 위기에 처한 상류층 여인 요안나(엄앵란)를 구해준 후 그녀와 사랑에 빠지나 비극적 최후를 맞는 모습에 대중은 눈물을 흘렸다. 고인은 스포츠머리로 이 영화에 출연해 전국에 스포츠머리를 유행시켰다. 1964년 고인이 주연한 영화는 ‘맨발의 청춘’을 포함해 32편. 그나마 이는 적은 편이다. 고인은 전성기 때 1년에 40~50편씩 영화에 출연했다. 그는 65년부터 한동안 연예인ㆍ예술인 납세 1위 자리를 지켰다. 통금이 있던 당시 내무부장관이 밤 촬영이 가능한 전국 야간통행증을 배우로서는 유일하게 고인에게 발행했다. 세수 증대에 기여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영화 '겨울여자'(1977)에서 신성일씨는 배우 장미희와 호흡을 맞췄다.
강신성일로 16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던 배우 신성일씨. 한국일보 자료사진

배우로서 탄탄대로를 달렸다. 정진우 임권택 감독 등 당대 유명 감독 영화에 출연해 김지미 윤정희 문희 남정임 문정숙 장미희 강수연 등 최고 배우와 호흡을 맞췄다. 하루 24시간을 6등분해 영화 4편을 동시 촬영할 정도로 일이 넘쳤다. 인기와 재력을 바탕으로 제작과 연출 일에도 뛰어들었다. 1971년 ‘연예교실’로 감독 데뷔했다. 이후 ‘어느 사랑의 이야기와 ‘그건 너’ 등 3편을 더 연출했다.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가 침체기를 맞으면서 고인의 연기활동에도 노을이 깃들었다. 출연 영화 편수는 1년에 한자릿수로 줄었다. 정치 활동도 연기에 영향을 줬다. 고인은 생전 “원래 정치를 멀리 하려 했으나 영화계가 무너질 때가 40대 초반 젊은 나이라 고향에서 정치적 기반을 닦자는 야심이 싹 텄다”고 밝혔다. 81년 11대 총선 때 강신영 이름으로 용산ㆍ마포 지역구에 출마해 낙선했다. 1996년 15대 총선 때 강신성일로 개명하며 대구 지역구에 출사표를 던졌으나 여의도에 입성하지 못했다. 고인은 2000년 16대 총선에서 금배지를 달았다.

2000년대 들어선 곽경택 감독의 ‘태풍’(2005)에 출연했을 뿐 활동이 거의 없었다. 2013년 49세 어린 후배 배우 배슬기와 연기 호흡을 맞춘 ‘야관문: 욕망의 꽃’에 주연으로 출연해 화제를 뿌렸다. 영원한 청춘의 상징처럼 그는 매번 관습에 도전하고,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었다. 고인은 지난해 6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후 한국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나는 도전 정신이 충만하다”며 “지금부터는 한번도 가보지 못했던 ‘암세포의 세계’에 도전하는 거”라고 밝혔다. “2020년 데뷔 60주년을 맞는데 내 특별전은 꼭 참여하고 싶다”고도 했다. 안타깝게도 ‘맨발의 청춘’의 마지막 꿈은 ‘별들의 고향’에서 이뤄지게 됐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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