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으로 4일 새벽 타계한 고(故) 신성일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영화계 최고의 스타였다. 530여편의 출연작 가운데 주연작만 무려 506편에 이르는 ‘톱(Top) 오브 톱’이었다.
▶ 암울했던 1970년대, 다른 꿈을 꾸기 시작하다
한국영화의 황금기로 일컬어졌던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로 접어들면서 고인은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는데 눈을 돌렸다.
반공을 국시로 앞세운 ‘의무제작’ 제도 도입과 외화 수입쿼터제 시행 등 독재정권의 잘못된 정책과 검열 강화로 이른바 ‘호스티스물’ 범람 등 쇠퇴기를 겪게 된 한국 영화계의 재도약을 위해 1977년 고향 대구로 내려가 정치인으로의 변신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10·26 사태로 사망하고 1980년 ‘서울의 봄’이 오면서 출마 계획에 차질이 빚어진 뒤, 1981년 제2야당이었던 국민당 소속으로 마포·용산 지역구에 나섰지만 낙선했다.
훗날 고인의 회고에 따르면 유권자 대부분이 신성일은 알지만 본명 강신영은 몰라 벌어진 결과로, 선거 패배로 거액의 빚까지 지게 된 뒤 대구로 낙향해 아내 엄앵란의 식당 경영을 도우면서 한동안 칩거 생활을 했다.
앞서 1960년대 후반에는 필름 공장 건립을 추진하다 사기를 당해, 당시로서는 엄청난 거액이었던 1억원을 날리는 등 불운을 겪기도 했다.
고인은 여러 차례 인터뷰에서 “이 모든 도전들이 한국영화를 위해서였다. 국회의원은 영화법을 개정해 영화계를 살리고 싶어 도전했고, 필름 공장은 싼 값으로 필름을 공급하기 위해 건립을 추진했다”며 “대부분 실패했지만 영화인으로서 해야 할 일을 꿈꿨다는 점에서 부끄럽지 않다”고 밝혔다.
▶ 제작자에서 마침내 국회 입성 그러나…
국회의원 도전과 필름 공장 건립 등 야심차게 도전했던 일들이 모두 무위에 그친 뒤 제작자로 변신해 1989년 성일씨네마트를 설립한 뒤, 이듬해 1호 작품으로 선보인 ‘코리안 커넥션’을 포함해 총 6편의 작품을 제작했다. 이로써 연기와 연출, 제작을 모두 경험해 본 영화인으로 우뚝 서게 됐다.
이처럼 다방면의 활동을 펼치는 와중에도 국회 입성의 꿈을 버리지 못한 고인은 예명에 본명을 더한 강신성일로 개명후 또 한 번의 낙선을 경험한 뒤 2000년 제16대 선거에서 한나라당 소속으로 대구 동구에 나가 2전3기의 기쁨을 맛봤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2005년 대구 하계 유니버시아드대회 지원법 연장과 관련해 옥외 광고물 업체로부터 1억8700만원의 뇌물을 받은 혐의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의정부 교도소에서 2년여간 수감 생활을 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 은퇴는 없다! 영원한 영화인만 있을 뿐
2년여의 수감 생활을 마친 고인은 경북 영천의 자택과 서울을 오가며 2010년 MBC 드라마 ‘나는 별일없이 산다’와 2013년 영화 ‘야관문 : 욕망의 꽃’의 주연을 맡아 연기 생활을 이어갔지만, 연기보다는 말년의 숙원 사업으로 삼았던 영화박물관 건립에 모든 힘을 쏟았다. 그러나 영화박물관 건립은 페암이란 암초를 만나 지금은 중단된 상태다.
얼마전에는 건강이 많이 좋아져 제23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하고, TV조선 ‘인생다큐 마이웨이’ 등 몇몇 TV 프로그램으로 팬들과 만나 건재를 과시하기도 했다.
유족으로는 아내 엄앵란과 장남 석현 씨, 장녀 경아 씨와 차녀 수화 씨가 있다. 석현 씨는 1989년 영화 ‘비 오는 날 수채화’에서 아버지와 함께 호흡을 맞추는 등 한때 영화배우로 활약했으며, 지금은 드라마 제작자로 활동중이다.
조성준 기자 when9147@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