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암으로 4일 새벽 타계한 고(故) 신성일은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는 한국 영화계 최고의 별이었다. 530여편의 출연작 가운데 주연작만 무려 506편에 이르는 ‘톱(Top) 오브 톱’이었다.
▶ 미남 고학생에서 은막의 별로 거듭나다
고인은 1937년 대구 중구 인교동에서 태어났다. 도청 공무원으로 일하던 홀어머니 밑에서 자라 경북중을 거쳐 최고의 명문 경북고에 입학하는 등 잘생긴 모범생으로 어릴 적부터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모친의 부업 실패로 가세가 기울면서 고교 졸업후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호떡장사 등으로 학비를 벌며 서울대 입학을 노렸지만 실패한 뒤, 우연한 기회로 배우의 꿈을 꾸게 됐다.
어렵게 연기학원을 다니며 배우 데뷔를 노리던 중 1957년 당시 최고의 메이저 제작사였던 신필림의 신인연기자 공모에서 2640 대 1의 엄청난 경쟁률을 뚫고 선발됐다.
이후 1960년 ‘로맨스 빠빠’로 데뷔하고 ‘상록수’ ‘백사부인’ 등에 출연하며 기본기를 다진 신성일은 1962년 ‘아낌없이 주련다’로 스타덤에 올랐다.
동명의 라디오 드라마를 원작으로 한 ‘아낌없이 주련다’에서 홀로 사는 연상의 술집 여주인(이민자)을 사랑하는 20대 청년을 연기해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청춘스타로 단번에 급부상했다.
▶ 평생의 파트너 엄앵란을 만나다
데뷔작 ‘로맨스 빠빠’를 비롯해 ‘아낌없이 주련다’ ‘청춘교실’ ‘새엄마’ 등 9~10편의 영화에서 상대역은 아니었지만 호흡을 맞췄던 한 살 연상의 엄앵란과 연인으로 발전하게 된 작품은 ‘배신’이었다.
키스신 촬영에서 엄앵란에게 실제로 입을 맞춰 자신의 마음을 처음 알렸던 고인은 ‘대륙의 밀사’ 촬영 도중 벌어진 화약 폭발 사고로 얼굴을 다친 엄앵란을 극진히 간호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이들은 ‘맨발의 청춘’ 등을 거친 뒤 마침내 1964년 워커힐호텔에서 화촉을 밝혔다.
당시 결혼식은 3400여명의 하객이 몰려와 외신에도 보도되는 등 국제적인 화제를 뿌렸다.
고인과 엄앵란 부부는 반 세기가 넘는 결혼 생활동안 몇 차례 파경 위기를 겪기도 했지만, 이를 극복하고 영화계의 ‘잉꼬 커플’로 남아 많은 이들의 귀감이 됐다.
조성준 기자 when9147@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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